[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외동아들의 사주를 본 어머니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40살에 단명할 팔자”라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보다 아들을 더 귀히 알고 의지하며 살았던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명을 늘릴 수 있느냐”고 간절하게 물었고, 사주쟁이는 ‘부처님에게 팔면 된다’고 말했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절에 다니는 먼 친척을 찾아가 ‘아들을 부처님에게 팔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고, 당시 원불교로 개종한 기타원 이법심행 교도(후포교당 창립주)가 그를 입교시켰다. 그렇게 단명 사주인 아들을 원불교에 판 어머니 덕분에 ‘소태산 대종사의 아들’이 된 황성학 대구경북교구장. 처음 <원불교 교전>을 읽었을 때 ‘너무나 좋아서 3일 밤을 꼬박 새며 정독했다’는 황 교구장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단명 사주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네요.
“어머님께서 가장 잘 하신 일은 저의 사주를 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주 때문에 제가 원불교에 입교하게 됐고, 전무출신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님께서 저를 ‘원불교’에 팔아서 이렇게 장수하고 있습니다(웃음).”

출가를 서원하기 전, 교화 경험도 있으신데요.
“저를 입교시켜준 이법심행 교도님과 함께 덕산선교소(후포교당 전신)에서 약 2년 정도 교화 활동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일요일 밤에 20여 명의 교도님들이 모여 교무님도 없이 법회를 봤어요. 물론 4축 2재도 지냈습니다. 당시 교화부장이셨던 좌산상사님께서 이 소식을 듣고 직접 방문해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법회를 봐 주셨어요. 이런 인연으로 원기61년 부교무 훈련에 특별 초청돼 교도이지만 부교무님들과 함께 보름간 훈련을 난 적도 있습니다.”

이후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대연교당과 인연이 됐고, 정연석 교무의 권유로 30세 늦은 나이에 출가를 결심하게 됐다(추천교무 박순정 교무, 보증인 정연석 교무).

원기75년(1990)에 삼동원으로 첫 발령을 받으셨어요.
“그 당시 삼동원은 계룡산 신도안에서 이전한 후 6년 만에 훈련원 건축을 마무리만 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예타원 전이창 원장님으로부터 받은 첫 임무가 삼동원 봉불식 준비였고, 두 번째 임무는 삼동원 첫 훈련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시도한 훈련이 삼동원 성리훈련입니다.”
 

6.15공동선언 5주년 기념 평양방문.
6.15공동선언 5주년 기념 평양방문.

특별히 기억에 남는 현장교화나 근무지의 추억을 들려주세요.
“전북교구 사무국장 시절(원기87년, 2002) 시민활동을 활발하게 했습니다. 같이 근무했던 오광선 교무의 도움이 컸어요. 각종 시민단체와 연대해 사회의 소수 약자들을 위한 일에 앞장섰고, 통일연대 공동의장 자격으로 활동하면서 ‘6.15 공동선언 5주년 평양대회’에 시민사회 대표로 선발돼 평양에 다녀온 일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이후 황 교구장은 교정원 교화훈련부 차장 시절, 정식 <예전집례집>을 발행했고, 승좌설법 의례를 만들었다. 또 장례의식 중 집불의 범위를 좁히고, 차·과장급까지 상주를 설 수 있도록 개선한 일 등을 보람된 일로 기억했다. 영광 국제마음훈련원 재직 시에는 봉불식과 조경사업, 산책로 개발과 삼밭재 새벽기도 프로그램 개발, 동선 실시 등 큰 성과를 나퉜다.
 

주는 교화, 베푸는 교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불공,
황 교구장은 맞춤불공이

교화를 회복시키는 근본적 처방임을 일깨운다.

전무출신으로서 공부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제 공부의 원동력은 흔들림 없는 신심이었습니다. 저는 출가를 늦게도 했지만 어렵게 했기 때문에 ‘출가한 것만으로도 이생의 원을 이뤘다’고 생각했습니다. 출가한 이후로 한 번도 신심이 흔들려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오롯하게 전무출신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울러 황 교구장은 꾸준한 ‘정성심’을 원동력으로 삼았다. “전무출신은 달리기로 비유하면 마라톤 선수이지 단거리 선수는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전무출신의 서원인 성불제중을 위해 뚜벅뚜벅 쉼 없이 걷는 것에 대한 ‘조급함이 없는 마음자세’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교단 제4대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교단 교화를 돌아본다면.
“‘지금 우리 교화는 누군가에게 도움과 혜택을 주고 베풀고 있는가? 아니면 도움과 혜택을 받고 있는가?’ 저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봅니다. 교화의 핵심은 교도님들에게 ‘정신·육신·물질로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교단 초기의 교화 방향도 ‘주는’ 교화, ‘베푸는’ 교화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게 교도로부터 ‘대우를 받는 교화자’, 교도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교당’이 된 것은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불공, 황 교구장은 이런 맞춤불공(실지불공)이 교화를 회복시킬 근본적인 처방임을 일깨운다.
 

대구광역시 교육청과 각 사회단체 자녀교육 대시민 협약식.
대구광역시 교육청과 각 사회단체 자녀교육 대시민 협약식.

재가출가 교도들이 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정신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비전’입니다. 교단 제4대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단 구성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교단 제4대 설계안에 ‘K-종교, 원불교의 시대가 열린다’는 비전을 제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세계는 K-컬처 즉 한국문화(K-뷰티, K-드라마, K-무비, K-푸드 등)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그 나라의 사상과 철학, 종교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멀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세계인들의 관심은 K-철학, K-종교를 찾을 것이고, 그 중심에는 K-종교 원불교가 자리매김 할 것입니다.”

황 교구장은 세계인이 K-종교 원불교를 찾는 그 날을 함께 꿈꿔 보자고 당부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확신에서다. 

비전과 함께 두번째로 교단의 정체성 회복을 강조하셨는데요.
“소태산 대종사님의 초기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교단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교화를 살리는 길’이고, 모든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봅니다. 불법을 시대화·생활화·대중화한 소태산 대종사님의 교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일과 수도가 둘이 아님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면 우리 교법의 정체성이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황 교구장은 일 속에서 꼭 실천해야 할 수행을 덧붙였다. “일과 준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침 좌선은 소태산 대종사님과 하나 되는 시간입니다. 일원의 체성에 합하고 진리와 합일되는 순간입니다. 스마트폰을 충전해야 사용할 수 있듯, 공부인의 충전시간입니다. 수도인은 아침 좌선, 보은 불공, 저녁 염불, 일기 기재 등 일과 속에서 득력해야 합니다. 일 속에 공부가 있고, 공부 속에 일이 있습니다.”

후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제가 전무출신을 서원했을 때 당시 선진님들이 ‘귀한 인재들이 들어왔다’며 크게 칭찬을 해주신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의례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이제 그 위치에서 후진들을 바라보면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출가 서원에 대한 자부심을 놓지 말았으면 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 교법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전무출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구종교인평화회의 신년하례회.
대구종교인평화회의 신년하례회.

[2024년 3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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