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화 교도
김상화 교도

[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30여 년 전, 남편을 따라 처음 갔던 교당은 법인절 준비에 여념 없었다. 마치 명절처럼 다들 웃는 얼굴로 기도하고 법당을 단장했다. 교당에 처음 온 새댁에게 교무님은 목탁을 선물했다. 목탁을 어설프게나마 꼭 쥐고 일원상 서원문과 반야심경을 외웠다.

그러던 어느날 거짓말처럼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 하늘이 무너지는듯 망연자실한 채 어린 딸만 부여안고 견뎠다. 그런 그의 집에 교무님이 찾아왔다. 제 발로 교당을 찾아온 새댁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걱정스러웠다는 말과 함께였다. 故 송선만 교무의 관심과 걱정은 김상화 교도(서광주교당)에게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위로가 됐다. 

이후 남편의 천도재를 지내면서 김 교도는 ‘딱 1년만 더 살아서 열반기념제까지만 지내주고 죽어야지’하는 모진 다짐을 남몰래 했다. 그렇게 혼자가 돼서 딸을 키우려고 보니 그에게는 ‘자력생활’이 필요했다. “큰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서 딸을 키워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죠.” 이를 알게된 송 교무는 그를 새 직장에 추천했고 그가 혼자 설 자리를 만들어 줬다. 그 은혜는 김 교도의 1년을  2년으로, 그렇게 지금까지 살 수 있게 했다.

사실 ‘1년만 살겠다’고 다짐 했을 때는 세상을 그냥저냥 살았다. 직장생활을 하며 봉공회 활동이나 기도나 법회에 참여할수록 뜨끈한 훈기가 마음에 피어났다. 그 훈기는 그를 슬픔에서 벗어나게 했다. 어느 날은 소풍 나갈 마음을 나게 했고, 또 어느 날은 웃게 했으며, 그렇게 그를 ‘살아가게’끔 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엄마가 있지만 그중 김 교도는 ‘공부하게 하는 엄마’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빠를 하늘로 보낸 딸과 아빠의 첫 기일을 준비하며 “엄마가 1000원을 주면 100원은 아빠를 위해 모으자”고 했다. 갖고 싶은 것이 많을 나이, 그러나 딸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며 토달지 않고 꼬박꼬박 아빠를 위한 돈을 모았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여행은 못보냈어도 신성회 훈련은 빠뜨리지 않고 보냈다. 그 덕분일까. 딸은 차곡차곡 원불교와 정을 쌓았고, 그렇게 쌓인 정은 어느덧 고운 서원이 됐다. “딸이 고등학교 2학년에 진학할 무렵에 교무님께서 ‘전무출신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고 귀띔해 주셨어요.” 이후에도 딸은 알아서 척척 그 길을 향해 걸어나갔다. 엄마가 공부하게 했던 딸, 최규원 교무(어양교당)는 이제 어엿한 교무로서 엄마를 공부하게 하는 딸이 다.

처음 남편을 여의었을 땐 원망을 많이 했지만, 돌아보면 그로 인해 원불교를 알게 됐다. 그러니 그에게 원망은 곧 감사와 다름없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에게 남긴 남편의 마지막 선물 ‘감사’를 모녀는 가슴에 영원히 품고 살고자 한다.

[2024년 3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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