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정관평(貞觀坪)은 소태산 대종사와 8인의 제자들이(정산종사는 방언공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음) 저축조합을 통해 모은 자금으로 개펄을 막아 마련한 농경지다. 원기3년(1918) 3월 방언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원기4년(1919) 3월까지 만 1년 동안 방언공사가 이뤄진 영산방언상(靈山防堰相)의 현장이다. 

간석지에 방언답을 막고 처음 농경지를 마련했을 때 지역 주민들은 9인이 만든 논이라 해서 구호농장(九虎農場)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훗날 원기19년(1934) 10월에 발행된 〈회보〉 제12호에서 정관평이라는 명칭의 처음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정산종사 때부터 정식으로 불리게 된다. 

정관이라는 명칭은 중국 당나라의 전성시대를 이뤘던 당 태종의 연호다. 평화 안락한 지상 극락을 건설하겠다는 의미로 정관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관평은 길용리 해안 전면의 보은강을 중심으로 양옆에 방언답을 쌓아가며 공사를 진행했고, 보은강을 사이에 두고 영산선학대 쪽의 작은 언답과 와탄천 쪽의 큰 언답으로 나뉜다. 규모는 84,981㎡이다.

당시 조합장이었던 소태산 대종사는  여덟 조합원 단원들에게 일부는 새끼를 꼬게 하고, 일부는 소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 바닷물이 빠지고 개펄이 들어설 때마다 소태산은 직접 개펄을 면밀히 측량·조사해 축제선을 정해 수십 개의 막대기를 꽂아 새끼줄을 쳤다. 또 방축을 할 때는 삼태기와 지게로 흙을 져 날라 축대를 쌓았다. 길용리의 개펄은 조수간만이 심해 한 달 중 밀물이 높을 때 보름간은 개흙땅이 질어 방언 일을 하지 못했고, 조수가 낮은 보름 동안에 공사가 진행됐다.

방언공사는 간척사업으로는 소규모의 소박한 개펄 막이었으나, 조선 농어민이 자주적으로 시행한 획기적인 역사로서의 의미가 크다.

또한 민간이 간석지를 막는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이웃 주민들은 “옥녀봉에 박을 심고, 촛대봉에 대를 심세. 바다막아 가패신망, 저 불쌍한 조합꾼들. 옥녀봉에 박을 따다, 박작 치고 빌어먹게, 촛대봉에 대를 끊어 지팽 짚고 빌어먹게”라고 노래를 부르며 비웃기도 했다.

처음에는 소태산 대종사와 8인 제자만 방언 일을 했지만, 근처 개흙땅의 소모가 넓어지면서 인부를 여럿 쓰게 됐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일이 점차 성사되어 감을 보면서 돈을 벌기 위해 찾아 오기도 했다. 장차 소작을 얻을 궁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부가 많을 때는 5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이로 인해 품삯이 많이 나가게 돼 공사 중 자금난으로 부득이 조합원들의 증자가 필요해지기도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방언을 감역하면서 “지금 구인은 본래 일을 아니하던 사람들이로되 대 회상 창립시기에 나왔으므로 남다른 고생이 많으나 그 대신 재미도 또한 적지 아니하리라. 무슨 일이든지 남이 다 이루어 놓은 뒤에 수고 없이 지키기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고생을 하고 창립을 하여 남의 시조가 되는 것이 의미깊은 일이니, 우리가 건설한 회상은 과거에도 보지 못하였고, 미래에도 보기 어려운 큰 회상이라(하략)”고 법문했다(〈대종경〉 서품 8장).

[2024년 3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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