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4년(1919) 초겨울에 저축조합은 발전적 해체를 맞았다. 이때 이동안은 고향인 영광 묘량면 신흥에서 10여 명과 함께 길룡리 기성조합의 정신을 이은 ‘묘량수신조합’을 조직했다. 

당시 조합원 전체는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됐고, 7년간 1,100여 원을 모았다. 묘량수신조합은 저축사업을 진행하면서 도덕운동도 전개했다.

이런 운동을 계기로 원기12년(1927) 신흥마을에 회관이 건설됐고, 신흥출장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합원은 불법연구회원이 됐고, 조합 자산은 교산에 편입했다. 지도는 영산지부가 맡았다. 신흥출장소로 인해 신흥에 교육열이 불었고, 수십여 명의 전무출신이 배출돼 초창기 교단의 창립 초석이 됐다.

[2024년 3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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