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현 교도
김소현 교도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결국, 다시 교화였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스물아홉 살이던 아내가 “원불교를 다녀야겠다”고 나서자 말없이 따라왔고, 서른두 살에 덜컥 부회장을 맡아 20여 년을 해냈다. 남편은 한의사, 그는 한방간호사로 따뜻한 의술도 신앙도 함께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쓰러졌다.

“쓰러진 지 1년 만에 남편(故 임성일 교도)이 열반하고, 처음으로 교당을 쉬어봤습니다. 이제까지의 공부가 헛공부였나 싶을 만큼, 그제야 원망심이 시작됐어요.”

감사생활로 넘어서야 했다. ‘일단은 쓰고 보자’, ‘일단은 기도하자’며 공부에 매달리니, 교법이 다시 읽혔다. 그 사이 훌쩍 자란 세 아이와 서로 의지하고 불공했다. 어느덧 엄마의 울음도 잦아들었다. 

“해가 두 번이나 바뀌어있더라고요. 경계를 당하고 보니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걸 더 느꼈죠. 그리고 생각했어요. ‘이제, 보은해야겠다’.”

해답은 교화였다. 그 어떤 이름보다 남편은 그에게 ‘교화 동지’아니었던가. 언젠가 남편과 손잡고 여동생 부부(김선영·윤정수, 하단교당)에게 갔다가 슬쩍 원불교 얘기를 흘리자마자 그길로 동수원교당에 달려가 교도가 됐다. 아직도 동생은 “그때 언니랑 형부가 손도 안 대고 코 풀었다”고 할 정도였지만, ‘하면 된다’고 깨달은 계기였다.

이제 엄마가 욕심났고, 수성교당에 전화해 일면식도 없는 교무님과 판을 짰다. 엄마가 교당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박인원 교무는 버선발로 달려가 “형님!”하며 맞았다. 그 뒤에는 일사천리였다.

“다음은 아버지였어요. 아버지의 공무원 경력과 성정을 활용해서, 교당의 결산보고서를 가져가 조언을 구하는 척했죠.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이렇게 운영하는 곳이라면 다닐 만하다.’” 이제 와 보면 술술 풀린 것 같지만 실로 많이 고민하고 기도했던 가족교화. 원래 교도이던 시댁은 물론, 친정도 빈 데 없이 알뜰하게 교도로 만들었다. 

“제게 온 어려움을 원불교로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많이 합니다. 가까운 자녀에게부터 원불교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며 살고자 했는데, 그것도 힘이 된 것 같아요.” 

일을 되게 만드는 힘과 포용력이 장점인 김 교도. 지금도 그는 청학교당 또래들과 교화의 못자리를 펼치는 날들이 가장 행복하다. 

일원가정으로 가족교화하던 모든 순간에 남편의 웃는 모습이 아로새겨 있다. 여전히 어딘가에서 사랑과 응원을 보내주고 있을 남편. 이생 가장 사랑했던 그를 보내고 돌아온 자리는, 결국 다시 교화였다.

[2024년 3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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