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깨달은 이들은 어떤 표준으로 신앙과 수행을 해 나가면 될까. 똑 떨어지는 단 하나의 효과적인 비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만, 깨달은 이들도 기호와 체질과 인연이 각각인지라 공부법도 제각각이다. 

수많은 공부법 가운데, <정전> 일원상 법어를 표준으로 한 신앙과 수행법을 소개한다. 그냥 법어대로 살면 되니 방법은 간단한데, 이걸 글로 표현하려니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일원상 법어를 표준으로 한, 깨달은 이들의 신앙법 중 하나는, 우주 만물과 그 작용을 곧 나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허공과 일체 존재, 일체 현상을 다 진리의 작용, 나의 작용으로 보는 것이 참다운 신앙이다. 일체가 일원 아님이 없고 일원의 작용 아님이 없음을 돌이켜, 그것을 다 내가 하는 경지로 삼는다. 바람 불고 꽃피고 춘하추동·생로병사·인과보응하는 모든 것이 진리인 나의 작용이라,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고 일체를 부처로 모시며, 일체 현상에 흔들림 없이 해탈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일원상 법어를 표준으로 한, 깨달은 이들의 수행법 중 하나는,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진리를 그대로 가져다 육근을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쓰는 것이다. 일원인 진공을 돌이켜 육근을 작용하는 것이 핵심이니, 이를 간략히,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다고 표현한다. 육근은 몸만이 아니라 의식도 포함된다. 생각·감정·의식 등은 수·상·행·식이지 참 주인공 성품이 아니다. 주인공 성품을 떠나지 않고 육근인 심신을 잘 부려 쓰는 것이 수행의 요체다. 

나를 비운
대공심(大空心)이 되면,
전체가 나인
대공심(大公心)이 된다.

법신불 자체가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니, 이를 체받아, 육근을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사용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원만(圓滿)이란, 법신불이 먼지 하나, 허공 한구석도 제외하지 않고 다 품은 상태를 말한다. 원만하기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춰있어 또한 구족(具足)이 된다. 지공무사(至公無私)에서 지공(至公)이란 지극히 공변되어 사(私) 없는 상태이니, 지공(至公)이 곧 무사(無私)다. 자기 위할 줄만 알고 공심이 없으면 환영받기 어렵고 영생을 통해 복이 없게 된다. 일원상 법어에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쓸 때마다, 그 앞에 각각 일원상 하나씩이 그려져 있다. 일원으로 돌아가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쓰라는 신호다. 

눈을 사용할 때마다 자성인 일원으로 돌아가 잘 사용하고, 귀를 사용할 때마다, 코를 사용할 때마다, 입을 사용할 때마다, 몸을 사용할 때마다, 마음을 사용할 때마다 자성인 일원으로 돌아가 사용하면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진리작용이 되며, 이것이 곧 최고의 수행이다. 하지만 입을 사용할 때 귀는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이 하나라 육근을 동시에 운영하지, 따로 각각 챙기는 차원이 아니다.

신앙과 수행은 나눠지지 않는다. 신앙은 잘하는데 수행은 못한다든지, 수행은 잘하는데 신앙은 안 된다든지 하는 말은 맞지 않다. 자성을 반조하여 일원에 비춘 상태에서는 신앙과 수행은 동시작동이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과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은 표현만 다를 뿐 동전의 양면으로 하나다.

육근으로 나를 삼은 그 나를 비운 대공심(大空心)이 되면, 전체가 나인 대공심(大公心)이 된다. 대공심(大空心)은 수행의 핵심, 대공심(大公心)은 신앙의 핵심이다. 일원상 법어를 표준으로 한 신앙 수행법은, 이 원상을 각(覺)하지 않은 이는 사실 실행하기 어렵다.

/변산원광선원

[2024년 3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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