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어김없이, 나무는 거기 있었다. 
작업실 문을 열면, 몸보다도 더 큰 나무가 새벽빛을 띄고 맞이했다. 여기에 소년 소태산의 고민과 청년 소태산의 깨침, 장년 소태산의 열반이 새겨진다. 이 나무에서 오만 년을 이어갈 원불교 문화가 피어난다. 오직 나무와 칼과 나, 그리고 두 마음도 없이 오롯한 거룩한 신성. 성담 김정명 소목장(법명 원각, 여주교당)의 소태산 대종사 십상과 일원상 법어를 새긴 세월, 창 너머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꽃이 지고 눈이 내렸다. 돌아보니 9년이었다.
 

10m·4m 규모 소태산 대종사 십상·일원상법어 대작
소목장·조각가·화가·서예가 다 되는 유일한 예술가
대한민국 가장 큰 목조각… 원불교 문화 고민 담아

3월 31일 원불교소태산기념관 공개
3월 31일 원불교소태산기념관 소태산홀 로비에서 세상에 공개되는 ‘소태산 대종사 십상’과 ‘일원상 법어’. 46년 동안 나무를 만져온 김 소목장이 새겨낸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목조각이다. 십상 한 점의 크기도 1655×1495, 십상과 일원상 법어를 함께 건 면적은 가로 10미터 세로 4미터에 이른다. 소태산홀 왼쪽 벽의 52㎡를 그득 채우며, 공간 전체를 성스럽게 압도한다. 

시작은 위패 하나였다. 2016년 강남교당 교도들은 위패 제작을 위해 ‘나무하는 사람’을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인연이 닿은 김 소목장은 혼자서 4가지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나무를 짜내는 소목장, 새기는 조각가, 그리는 화가, 글씨 쓰는 서예가까지…. 이를 혼자 해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오직 그뿐이었다. 

“열일곱부터 나무를 만졌는데, 언젠가부터 큰 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원불교가 제게 왔을 때, 저의 간절함이 닿아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20대에는 출가도 하고 싶었고, 교회도 다녀봤다. 한때 다녔던 회사는 가톨릭 계열이었고, 증산도에도 좀 나갔다. 그런데도 그저 떠돌던 그. 그에게 원불교는 칼이 멈추는 곳이자 종착역이었다.

“한덕천 당시 강남교당 교감님께서 작품 이야기를 하시길래 제가 그랬어요. 허락해주신다면, 이 교당보다 더 비싼 작품을 해드리겠다고요. 진심이었어요. 그만큼 하고 싶었거든요.”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이번에는 서울교화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작품 제안을 받은 김 소목장. 무대도 원불교소태산기념관으로 더욱 커지니, 그의 가슴은 단박에 벅차올랐다. 

전북 삼례에서 찾아낸 느티나무
“나무 구하는 일은 하늘이 도와야 하죠. 크고 색감이 좋고, 단단하면서도 칼을 잘 먹는 나무가 잘 없어요. 더구나 10년 이상 통풍이 잘되는 음지에서 말렸어야 했어요.”

결국 직경 2m가 넘는 대물을 찾아낸 곳은 전북 삼례였다. 보통은 나무를 노지에서 말리는데, 이 나무는 통풍이 잘되는 천막 속에서 십수 년간 잘 건조되고 있었다. 100년 전 이리에 원불교 중앙총부 기지가 건설될 때, 이 나무는 삼례에서 아름드리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소태산도 그 잎새 하나 거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매순간 가슴이 뛰었다.

 

손 가는 대로 하라, 잘될 것이다
좋은 나무를 구했으니 반은 이뤘다. 이제는 도안이다. 100년 전의 박중빈을 그리고 또 그렸지만, 여전히 부담스럽고 어려웠다. 불교 목조각에서 벗어난, 원불교 목조각의 독창적 특성이 있어야 했다. 기술로도 최고 난이도인 고부조로, 실존 인물을 조각해내는 어려움도 넘어야 했다. 

매일 소태산 대종사를 읽고 그려보며, 막힐 때는 영산으로 향했다. 여섯 번째였던가, 어느 날 영산 땅에 도착했을 때 문득 하늘에 일광이 비치며 온 땅이 환했다. 그 안에서 그는 음성을 들었던 것도 같다. ‘손 가는 대로 하라, 잘될 것이다.’

“저는 연필을 갖다 대기만 했습니다. 누가 그려주는 느낌이 들었어요. 도안이 그렇게 스윽 나왔죠. 이후로는 나무가 일러주는 대로 칼을 갖다 댔습니다.”

조각을 뒤집는 것도 누군가 있어야 하는 규모의 작업이었지만, 성물(聖物)이라 생각해 남의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목디스크가 기승을 부렸고, 척추 때문에 꼬리뼈 주사를 여섯 번이나 맞았다. 매일 발이 퉁퉁 부어 잠들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안부를 묻는 한덕천 서울교구장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목숨이 떨어져도 이건 마무리하고 죽겠습니다.”

이번 작품은 그 규모부터 기술까지 미켈란젤로가 그렸던 시스타나 예배당 그림과 비견된다. 허나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평면에 붓을 대는 거라면, 김 소목장의 작업은 나무를 칼로 새겨 겹쳐내는 입체다. 누구도 3년 만에 완성하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고 한 서울교구장 마저 “기한에 구애받지 말라”고 일렀건만, 그는 기어이 서울교화 100년 기념에 맞춰냈다. 

3월, 김 소목장은 모든 작품을 원불교소태산기념관으로 올려보냈다. 늘 가득 차 있던 작업실을 비우며 그는 열한 명의 딸을 시집보낸 아비의 마음이 됐다. ‘부디 잘 살아주길, 가서 소태산 대종사 십상의 역사이자 원불교 목조각의 시작이 되어주길. 세상이 이를 보고 스승의 생을 가슴에 새겨주길.’ 

이제 그의 손은 칼을 놓고 기도를 올린다.
 

[2024년 3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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