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편집국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뭉근한 한약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안심된다. 공간 속에 은은히 퍼지는 한방 향이 무언가 모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덕이다. 본래부터 한방은 몸과 마음의 호전을 함께 살피는 것이라고 했다.

한 자리에서만 오롯이 90년을 넘겼다. 한약재들로, 한약으로, 이곳에 은은한 한방 향이 흐른 게 말이다. 원불교 산업활동의 효시이자, 원불교 한의약업의 문열이인 이리보화당한의원(이하 이리보화당)의 역사는 한 곳에서만 우직하게, 끊임없이 흘러왔다. 거슬러 가보면, 시작점에 몸과 마음을 함께 살피고 다룸으로써 ‘건강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꿈’이 있다. (이리보화당은 보화당건재한약방·보화당약방·보화당건재약방·보화당약국·보화당제약사 등 시대 흐름에 따라 다양한 역할과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이리보화당으로 통칭해 사용하며, 시기에 따라 보화당약방을 병행한다.)
 

‘건강한 세상’ 만들고자 했던 원불교 의료사업 ‘최초’
1934년부터 90년째 같은 자리에서 지역사회 역할
구 건조창고는 등록문화재 제763-8호로 근대성 주목

모든 원불교 의료 관련 기관의 ‘최초’
근 100년이다. 1934년(원기19) 5월 20일 설립이 결의돼 그해 8월에 영업을 시작했으니. 정확하게는 올해로 90주년이 됐다. 

이리보화당의 역사 가운데 설립 결의부터가 의미 있게 여겨지는 것은, ‘소태산 대종사 재세 시에, 소태산 대종사가 임석한 불법연구회 대중공사에서’ 결의된 사업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동안 선진이 ‘한약방을 설립하여 그 이익금으로 기금을 모아 장차 자선을 중점으로 하는 종합병원 제중원을 설립하자’는 안건을 제출했고, 만장일치를 얻었다.

그해 8월, 중앙총부에서는 공익부 기금 1만여 원을 자본금으로 투자해 이리읍 본정 1정목(현 위치, 익산시 평동로11길 26-5, 인화동시장(구시장) 내)에 있는 치심당약방을 인수해 영업을 시작했다. ‘치심당약방’의 뜻을 풀면 ‘마음을 다스려 치료하는 약방’이니, 원불교와는 운명적 만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방 인수 후 첫 정식 명칭은 합자회사 ‘보화당건재한약방(普和堂乾材韓藥房)’, 줄여서 보화당약방으로 불렸다. 원불교가 인수하기 전부터 약방이었던 세월을 감안하면, 이 자리에서의 한의약업 역사는 100년이 넘을지도.

시작은 한약방이었지만, 이리보화당은 장차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목적의 자선종합병원 설립을 꿈꿨고, 양약 도소매업까지 영역을 확장해왔다. 그러니 이리보화당은 전국의 여러 보화당한의원이나 원광한의원은 물론, 원광대학교병원·원광종합병원·원광제약 등 원불교 모든 의료 관련 기관의 ‘최초 기관’임에 진배없다.

그뿐인가. 이리보화당 창립에는 ‘영육쌍전·이사병행’ 이념을 실현하는 산업 도량으로써 교단의 경제를 자립으로 해결하겠다는 포부도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리보화당은 단순히 한 기관에 그치지 않고, 원불교의 유지·발전을 위해 적지 않은 역할을 오랫동안 담당했다.
 

이리보화당은 90년째 똑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해내고 있다.원기19년(2024) 현재의 이리보화당한의원.
이리보화당은 90년째 똑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해내고 있다.원기19년(2024) 현재의 이리보화당한의원.

이리 상업활동의 중심지에서 시작
이리보화당이 영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보화당이 위치한 인화동시장(현 남부시장 또는 구시장)은 이리의 상업활동 중심지였다. 1912년 이리역 영업 시작에 이어 1914년 남부시장 부근에 구이리역(현 동익산역의 전신, 현재의 역사는 이전된 자리다. 자연지명으로는 원래 이 일대가 솜리 마을이었는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과정에서 행정구역으로써의 이리의 크기가 커지고 1912년에 신설된 이리역과 구분할 필요가 생김)이 들어섰고, 교통편의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이 활발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과거에는) 보화당 바로 앞 저 길에 버스가 다녔어요.” 이리보화당에서만 41년째 근무 중인 김학종 한의사교무의 이야기를 들을 땐 미처 몰랐다. 이리보화당 바로 앞 도로가 정확히 어떤 곳이었는지.

현재는 골목길로 여겨지는 보화당 바로 앞 남북도로(현 평동로1길)는 일제강점기 때 도시개발을 하면서 만들어진 간선도로다. 그리고 이 도로는 1977년에 인북로(현재의 큰길, 익산시장애인복지관에서 이리교당 사거리 방향)가 개통되기 전까지 일대의 큰길 역할을 했다. 지금의 한산한 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격세지감의 역사 일편이다.

김 한의사교무는 이 거리의 흥하던 시절의 풍경을 이렇게도 설명했다. “지금 여기가(로비 오른편) 옛날에는 양약을 팔던 자리예요. 장날이 되면 이 도로에 사람이 줄을 쫙 서가지고, 직원들이 다 동원돼서 약을 종이에 싸주기 바빴어요. 포대에 든 돈을 세느라고 퇴근을 못 할 정도였지요.”
 

이리보화당은 90년째 똑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해내고 있다.원기51년(1966) 양약부 일부를 신축한 모습.
이리보화당은 90년째 똑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해내고 있다.원기51년(1966) 양약부 일부를 신축한 모습.

선진들의 ‘분명한 뚝심’ 담긴 기관
이리보화당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보화당약방 초기, 건재 중 조금이라도 썩거나 불량인 게 발견되면 가차 없이 불에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다. 이는 비싼 약재에도 가차 없어서, 보화당약방은 물론이고 원불교에 대한 신뢰가 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러한 상황은 창립 3년째이던 때,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보화당에서는 1년 이상이 지난 일체의 약재를 버리고 항상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여 치료에 백발백중할 뿐만 아니라 일반 빈민에게는 무료시술을 하기 때문에 발전하며, 이는 45세 된 이동안 대표주무의 공익을 위한 희생적 분투와 지덕이 겸비한 노력의 대가이다. 또한 한약업자 대리 박이석과 함께 양질의 약재와 치료의 공신력으로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조선일보> 1937년(원기22) 8월 1일자.(원기22년 당시 이동안의 보화당약방 교단 직책은 전무이사(대표)).

또 이리보화당에서 1937년(원기22) 5월부터 시작된 야회는 익산 총부를 제외하고 당시 이리지역에서 열린 첫 법회이자 이리교당의 모체가 된다. 이리교당(당시 이리지부) 창립주인 이인의화 교도와 불법연구회가 만나는 과정에 이리보화당 야회에 참석한 적 있는 남안성 교도가 있는 것이다. 돈을 버는 목적이 ‘자선사업을 위한 종합병원 설립’이었고, 그 목적을 위해 ‘영육쌍전 이사병행’이라는 창립이념을 실현한 선진들의 ‘분명한 뚝심’이 마음에 훅 박힌다.

현재 이리보화당 구 건조창고는 등록문화재 제763-8호로도 주목받는다. 1967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약 창고로, 붉은 벽돌 벽체와 지붕 목조 트러스트, 환기창 등이 잘 남아있다. 약재를 더 쌓으려고 설치했던 천장 공간도 그대로다.

90년이라는 시간에 켜켜이 쌓인 이리보화당의 이야기를 만나면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100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있었으니까, (그래서) 익숙하니까, (당연히) 우리 거니까.’ 아마도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100년’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에 소홀했던 건 아닐까 하여 반성도 했다.
지금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그때 그 정신과 가치’, 세상이 알아보는데 우리가 어찌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2024년 3월 20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