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덕 교도
주명덕 교도

[원불교신문=김도아 기자] ‘익산’이라는 지역을 지금에야 제2의 고향처럼 정겹게 느끼지만 시집오면서 처음 만난 이곳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이었다. 그래서 한 일이 동네를 돌며 ‘교당’을 찾아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다 북일교당을 만났다. 때마침 아랫집에 살던 어른도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어린 새댁을 어른께서 어찌나 반갑게 맞이해주시던지….” 그 덕분에 주명덕 교도(북일교당)는 교당에 정을 ‘착’붙이게 됐다. 그 세월이 벌써 30여 년이다. “캄캄한 암흑 속에 혼자 있는 것 같았는데 교당 인연들이 ‘등불’이 돼 준거죠.”

주 교도에게 ‘교당’은 법연이 가득한 곳이다. 처음 그가 교당에 왔을 때 만난 어른은 당신 자녀보다 그를 더 자식처럼 챙기고 또 의지했다. “어딜 가도 꼭 제 손을 잡고 다니셨어요. 당신 것을 사면서 제 옷도 사주시고, 통장까지 맡겨놓을 정도였죠.” 그리고 교당에는 무엇을 하든 눈만 봐도 ‘통하는’도반들이 있었다. 

4월 28일 원불교 생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500~600명이 함께 모여 같이 밀가루 반죽을 했고, 그렇게 만든 쫀득한 면발에 달달한 짜장소스를 뿌리면 이내 멋진 잔치음식이 됐다. 그것을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줄 때면 힘든 것도 잊고 행복해졌다. 고된 일에 몸은 힘들어도 손발이 척척 맞는 법연들과 함께하니 즐거움만 가득했다. 

그런 마음이니 원불교 인연은 꼭 내 부모같았고, 형제같았고, 자식같았다. 그래서 어버이날이면 원로원을 찾아가 부모님께 등 밀어드리듯 목욕봉사를 했고, 어린이날이면 도시락을 싸서 원광대를 찾아 혼자 사는 학생들에게 반찬을 나눴다. 혹 아파서 교당에 못 나오는 교도가 있으면 병원을 모시고 가거나, 시장도 대신 봐주곤 했다. “봉공을 하면 어지럽던 마음도 금세 편해지고 늘 재밌었어요.” 

그렇게 봉공회장만 10년 넘게 해왔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봉공의 ‘찐한’재미를 알았던 건 아니다. “처음 봉공회장직을 제안 받았을 때는 언감생심 ‘절대 안 한다’고 했어요.” 그런 그의 마음을 돌린 건 당시 송선만 교무가 두 손을 꼭 잡고 건넨 한마디 덕분이었다. “행복을 손에 쥐여주는데 왜 안 하냐.”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교무님의 그 한 말씀에는 ‘복짓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임을 일깨워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었다. 그 말 한마디가 마음 속에 의심과 불신을 모두 녹여냈다. “이러니 원불교를 좋아할 수 밖에요.” 

그는 교무님이 쥐여준 행복 생활을 하며 ‘원망’을 ‘감사’로 돌리는 힘을 배웠다. “예전에는 화가 날 때마다 얼굴에 자주 붉게 열꽃이 피곤 했는데 지금은 다 가라 앉았어요.” 활짝, 열꽃이 폈던 자리에는 이제 웃음꽃이 환하다.

[2024년 3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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