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칼럼

<사진>한지성(호적명 지현, 광운대 교수, 원불교여성회장)

얼마전 여성단체에서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대통령 부인상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더니 미국 대통령 부인인 힐러리여사와 고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절충형이 이상형이라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이 보도 후에 「여성신문」에서 도대체 힐러리와 육영수의 절충형이 있을 수 있느냐, 마치 힐영수와 육러리처럼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박이 나왔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힐러리와 육영수 여사의 이미지는 공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곧 수긍하게 된다. 수영복 차림에 하이힐이 어울릴 팔등신 미인에게 어깨가 조붓하고 다소곳한 한복미인을 가미한다면 어떤 스타일의 몸매가 나올까?

힐러리 여사는 대통령의 아내로서보다 자기 자신의 직업을 통한 능력 발휘로 대통령 부인이 되기 전에 이미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살았던 사람이고 육영수 여사는 조신하고 현숙한 내조형으로 기억되고 있다.
두 사람의 절충형이라면 여성운동가가 동양적인 인내와 순종의 婦德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일까? 즉 이 두사람의 미덕은 전혀 공존하기 어려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장난도 아닌 토론회의 결과가 절충형으로 나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무릇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려고 하면 가능한 한 기왕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의 장점만을 취하여 한층 완벽한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다. 또 세상을 살아가기로 하면 남과 부딪히게 되는 일이 허다한데 그 일을 이루어내려면 이 모든 부딪히는 요소들을 잘 포용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옛 성현들이 中道를 얘기하셨고 정산종사님께서도 「화합의 재주가 제일 큰 재주」라고 하셨다. 그러나 힐러와 육영수의 예에서 보듯이 무원칙한 절충은 최선의 결과는커녕 균형을 잃어버린 기형아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중도는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처리해서 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비를 정확히 따지는 가운데서, 조화의 가능성을 찾아나가는 가운데서만이 얻어지는 것이다. 모두 다 좋은 일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점을 무작정 덮어둘 것이 아니라 가릴 것은 가려서,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위의 토론결과에서 보듯이 우리는 때때로 엉뚱한 절충형을 놓고 완벽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두루뭉수리의 처신을 놓고 중도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는지 돌이켜 보게 된다.

중도란 엄연히 道다. 극단적인 치우침을 경계한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또 화합은 시비를 떠난 자리가 아니다. 진정한 화합이란 시비가 분명할 때 오히려 가능한 것이다. 是는 是대로 非는 非대로 분명히 인정될 때 상대방의 입장을 포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공부인의 마음도 시비를 분명히 가리는 자리부터 시작해 시비를 넘어서서 포용하는 공부까지 병행해 가야 참 중도, 참 화합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절충은 중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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