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본분과 표준

“너는 교도를 챙기는데 무엇을 표준해서 챙기느냐? 모자라고 미천한 사람을 더 챙기는 것이 교화자의 본분이다”(《한울안한이치》에 기연따라 해주신 말씀 42장).

승타원 송영봉 원로교무가 수학을 마치고 교역생활에 첫 발을 내디딜 때 정산종사로부터 받든 법문이다.

“농촌교당에 교화를 나가면 혹여 음식이 맞지 않아도 달게 맛있게 먹고, 툇마루에 먼지가 있어도 그 자리에서 입으로 훌훌 불거나 옷을 탈탈 털지말고, 소탈하고 친근감 있도록 해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당부했다.

이 말씀을 받든 송 원로교무는 일생을 어렵고 힘든 교도들을 챙기고 교화한 것은 물론 어느곳에 처하든지 궂은일 낮은 일 가림없이 오로지 사무여한의 신성으로 일관했다.

송 원로교무에게 있어 정산종사는 평범한 아버지이기 보다는 ‘대중의 아버지’ ‘대중의 어머니’였다. 일평생 공인으로 대중속에서만 생활했던 정산종사였기에 송 원로교무는 아버지와 딸로서의 정겨운 추억거리가 많지 않다고 술회한다.

“한번은 정산종사께서 ‘너는 생전 나한테 네 공부한 이야기를 한번도 안하는구나’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때는 정산종사를 뵙는 것이 그저 부끄럽고 행여 정산종사께 누가 될까 싶어 자주 찾아뵙는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던 점도 있지요”

너는
교도를 챙기는데
무엇을 표준해서
챙기느냐?
모자라고 미천한
사람을
챙기는 것이
교화자의 본분이다.

정산종사는 송 원로교무에게 좋다 나쁘다는 자상한 말씀을 하신적도 없고 가끔 인사를 가기라도 하면 “그래 왔느냐”하는 정도의 말씀이 전부였다. 아마도 정산종사와 송 원로교무 사이에는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아버지와 딸 이상의 스승과 제자가 건네는 깊은 신뢰가 있었던 듯 싶다.

대종사는 열반 하시기 전, 영산에 계시던 정산종사를 총부로 부르시고 동선(冬禪)교감을 맡기셨다. 공회당에 조그마한 법좌를 마련 하신 대종사는 정산종사로 하여금 그곳에서 법문을 하시도록 했다.

“대종사님은 정산종사를 법좌에 앉히려고 하시고 정산종사는 극구 사양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보라빛이 돌던 밤색 오동나무 법좌도 말입니다. 그때 저는 어린소견에도 왜 그러실까 궁금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이미 두분은 법을 전하고 받으셨던 것 같아요. 그 법좌는 두분의 신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원기28년 대종사가 열반의 길을 떠나시고 대종사를 따르던 수많은 제자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너무 크신 어른이 열반하시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정산종사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땅에 접어 놓으시고, 대종사님 당대의 모든 동지들을 법형님으로 모시며 법을 세워 나가셨습니다”

송 원로교무가 마음속에 늘 표준으로 삼고 있는 법문은 ‘마음 넓히는 공부는 처음에는 시내같고 다음에는 강같고 마침내는 대해창강 같아서 불가사의한 역량이 있나니라. 참 성품의 여여함은 만고를 통해 길이 있나니’(정산종사법어 응기편 7장 중)라고 해주신 내용이다.

“마음이 괴롭고 스스로 작아질때면 ‘천지는 저렇게 넓은데 내 소가지는 왜 이렇게 좁나’하는 생각에 정산종사의 마음넓히는 공부에 대한 법문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송 원로교무는 첫 부임지인 운봉교당을 비롯, 서울교당, 동산교당, 정화사, 원남교당 초대교무를 역임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 교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원기60년 대산종법사의 해외교화에 대한 뜻을 받들어 뉴욕교당 교감으로 부임, 오늘날 미주교화의 기틀을 세웠다.

현재 수도원에 기거하며 ‘한마음 챙기고 성리 깨치는 공부’에 여념이 없는 승타원 송영봉 원로교무.

올해 소망을 묻는 기자에게 “어찌든지 본원이 퇴색하지 않도록 세세생생 대종사님 따라가야지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라고 답했다. 물흐르듯이 여여한 모습속에는 푸근하고 따뜻한 봄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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