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선사를 찾아 2500리 길

▲ 구정선사 설화가 전하는 오대산 월정사 동대관음암
"짚신아, 어째서 네가 부처냐? 짚신아 어째서..."

전남 영암에서 500㎞를 숨가쁘게 달려 온 강원도 오대산. 오대산에 흘러내리는 월정천은 온통 꽁꽁 얼어붙어 한 겨울의 추위를 실감나게 한다. 이 한 겨울에 나로 하여금 먼길을 단숨에 달려오도록 그 무엇이 만들었단 말인가?

《대종경》신성품 10장 ‘구정선사의 신성'에 대한 법문은 항상 나 자신을 반조케 한다. 어느 때부터 인가 과연 구정선사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에 불교학자에게 물어보고, 불교사전등을 찾아봐도 구정이라는 이름 한 구절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불교설화집에서 오대산 월정사 동대관음암(동관음암)에 전해지는 설화임을 알았다.

월정사(月精寺)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세운 사찰이다. ‘월정’이란 이름은 동대산 만월봉에 떠오른 보름달이 유난히 밝아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율사는 홀로 오대산을 찾아 초암(草庵)을 짓고 7일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날씨가 음산하여 당나라에서 한 노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은밀히 모시고 하산하였다. 이것이 바로 월정사의 시작이다.

필자는 월정사를 들리지 않고 2㎞거리의 동관음암을 먼저 찾기로 하였다.

동관음암은 오대중에 동대산 만월봉 팔부능선에 관음보살을 모신 암자이다. 오대산에 있는 사찰 대부분이 자장율사와 관련되지만 본격적인 출발은 그로부터 160년이 지난 성덕왕 때 보천(寶川)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동관음암도 마찬가지다. 그후 역사에 알려진 바가 없고 신라말 무염(無染 801∼888) 선사가 머물 때 구정선사 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후에 중건되었다. 암자는 축대를 높이 쌓아 전각을 세워서 전망이 참으로 좋다.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뜰 앞에 흐트러지게 피어있는 배꽃에 달빛이 비치는 것에 매료되어 지은 것이 얼마전에 매월당 문헌에서 나왔다고 월면스님은 말한다.

구정선사에 대한 법문은 대종경 외에도 대종경 선외록 은족법족장 제5에 상세히 소개되었다. 여기에서는 동관음암에 대대로 전해지는 설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신라 말 홀어머니를 모시고 비단행상을 하는 청년은 어느 날 명주(강릉)땅을 가다가 대관령 중턱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길가 풀숲에 서서 꼼짝 않고 있는 노승을 만나게 되었다. 청년은 하도 이상해서 노승에게 물었다.

“스님 대체 뭘 하고 계십니까?” “중생들에게 공양을 드리고 있지” 청년은 그 말이 무슨 뜻이지 알 수가 없어 다시 무슨 중생들이냐고 물었다. “옷 속의 이와 벼룩이 피를 먹고 있다네”

그 말에 감명 받은 청년이 노승을 따라 도착한 곳이 동관음암 이었다. 청년은 자신도 수행하여 스님과 같은 큰 선사가 되겠다고 하자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한다면 제자로 받아 주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나무하고 밥하며 스님 시봉 하면서 3년이 흘렀다. 그 동안 기다려도 법문 한 구절 가르쳐 주지 않자 어느 날 노승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다. “즉심이불이니라(卽心是佛)” 했다. 그러나 글자를 모르던 청년은 이것을 잘못 알아들어 ‘짚신이 부처’ 라고 생각했다.

‘짚신이 부처라고?’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스승을 지극히 존경하고 있었기에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고는 자기 짚신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늘 생각했다. ‘어째서 스승님은 짚신이 부처라고 하셨을까?’ ‘짚신아 어째서 네가 부처냐? 짚신아 어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질문만 반복하던 그는 짚신의 끈이 뚝 끊어지는 순간 마침내 크게 깨달았다. 깨닫고 보니 짚신이 부처가 아니라 ‘즉심시불’ 이었던 것이었다. 산에서 뛰어 내려와 노승에게 ‘즉심시불’이라고 말하자 아무 대답 없이 부엌의 가마솥을 걸으라 했다.

스승의 말에 엄동설한임에도 언 흙을 파 찬물에 이겨 솥을 걸었다. 그러나 노승은 솥이 기울었다 하여 다시 걸으라 했고 솥을 9번이나 걸고 나서야 청년의 깨달음을 인가했으며 9번 솥을 걸었다하여 9정(九鼎)이라고 법호를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무염선사라고 밝혔다고 한다. 동관음에서는 구정선사를 일명 ‘짚신부처’라고 부르고 있다.

동관음암 뒷산인 만월봉 옆에는 구정선사가 나무하던 구정봉이 있다. 구정봉을 오르다 보니 솥을 걸기 위해 흙을 팠던 ‘흙구덩이 터’가 있고 조금 위에는 도를 깨쳤다는 ‘좌선대’가 있다.

월명스님과 호박죽 공양을 마치고 암자를 내려와 상원사, 월정사, 대관령을 거쳐 다시 영보교당으로 출발했다. 과연 나는 2천5백리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천구정, 만구정 아니 천장(千鼎), 만정(萬鼎)이 되어 대종사님의 법을 오롯이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이번 여행이 힘은 들었지만 손해본 장사는 아니었지 않은가.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