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로의 저노한과 나의 다짐

▲ 형산 아버님(김홍철 종사)이 계시는 송대를 찾은 가족들.왼쪽 첫 번째가 필자.
교학과 1학년을 수료하고 육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3년간 마치고 귀가하였다. 어느날 부모님과 5남매가 한 자리에 모여 나의 진로에 대한 가족회의가 열렸다.

“대성아 미안하다. 어쩔 수 없다. 대성이가 전무출신을 포기하고 어머님을 모셔야 하겠다.”

아버님의 이 말씀에 모두들 고개를 수그리고 말이 없었으나 나는 가슴이 뛰고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님은 다시 말씀을 이었다.

“할아버님을 이어 3대를 전무출신하도록 뒷바라지를 한 너의 어머니가 이제는 늙어서 일을 할 수 없으니 누군가가 봉양을 해야 한다. 형은 이미 전무출신을 하였으니 대성이가 해야 한다.”

이 말씀이 끝나자 어머님께서 잔잔하면서도 무겁게 말씀을 하셨다.

“너희들의 할아버님께서 ‘우리 회상은 영겁을 두고 다시 만날 수 없는 대도회상이다. 내가 대종사님을 높이 받들어 모신 것을 깊이 명심하여 자손 대대로 전무출신 많이 하여 꽃다운 가훈을 천추에 전하여라. 대종사님께 큰 효자가 되어라.’ 하신 유언을 받들어 오직 너희들을 전무출신하도록 권장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아왔다. 그런데 나 때문에 대성이가……."

어머님은 더 이상 말씀을 잇지 못하였으며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온 가족은 말이 없고 방안 공기는 어둠을 무겁게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대종사님은 출가와 재가를 구별하지 않고 공부와 사업을 동등하게 인정했으며 오히려 재가를 더 장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혈연으로는 부모보다 더 가까운 인연이 누가 있는가. 법연도 혈연이 있어야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어머님의 여생을 편안하게 봉양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희생으로 아버님과 형제들이 전무출신을 잘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나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안정이 되었다.

“아버님, 제가 어머님을 모시겠습니다.” 하였더니 아버님께서는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그래. 장하다. 우리가 너의 몫까지 다하마.”

하셨다. 어머님도, 누나, 형도 다함께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우리가 왜 울었는가를 알 수가 없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님, 제가 어머님을 봉양은 하지만 전무출신을 하는 누나, 형보다 공부와 사업을 더 잘 하겠습니다. 재가라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오냐. 너의 결심을 보니 마음놓고 공중사를 할 수 있겠다.”

하시며 환한 모습을 보이셨다. 어머님은 고마우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후 나는 국어국문학과로 전과를 하여 대학을 수료하였다. 대학을 다닐 때는 원광고등공민학교(야간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고 그 때 제자가 여러 명 전무출신을 하여 지금 교무로 일하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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