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발로쓴 이야기 교사

▲ 본래 월명암법당 위치는 현 법당건물 뒤쪽이라 한다. 앞으로 월명암법당이 옮겨지고 새로운 대웅전이 월명암 옛터에 세워진다.
새 회상과 월명암은 인연이 참으로 깊은 곳이다. 대종사는 영산에서 방언공사가 마무리 될 즈음 영광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후 월명암과 인연이 되어 그 해 말 변산으로 입산해서 실상초당으로 내려오기까지 2개월여 동안 임시로 계셨던 곳이다.

월명암은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로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함께 호남의 3대 영지로 관음보살을 모셨다. 신라시대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월명암이란 부설거사의 딸인 월명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부설거사는 현재 경주 향교가 있는 교촌에서 태어나 불국사에 출가하여 영희·영조 두 도반과 지리산을 거쳐 능가산(변산)에 들어와 묘적암을 짓고 수도하다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길을 떠나 만경 고현리(부설원)에서 묘화부인을 만나 거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수도하여 성불하고 열반에 들자 자녀인 등운과 월명은 아버지가 수도하였던 묘적암 옆에 월명암과 등운암을 짓고 수도하였으며, 묘화부인은 살던 집을 부설원이라 이름하고 수도하여 일가족 모두가 성불을 하였다고 전한다.

묘적암은 현재 월명암 법당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미터를 가면 있다. 현재는 월명암 스님들의 토굴정진하는 곳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못하게 하고 있다.

이 묘적암 옆에는 2기의 부도가 있는데 왼쪽에 있는 석종형 부도가 부설 거사의 사리탑이라 전해온다. 실재 《부설전》에 보면 부설거사가 입적한 뒤 다비해서 그 사리를 묘적봉 남쪽 기슭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어 어느정도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

"월명암은 태고사 운문암과 함께
호남 3대 영지로 관음보살을 모셨으며
신라시대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됐다."

본래 월명암 법당 위치는 현 법당건물 뒤쪽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 진묵대사가 중창하고, 철종때 다시 크게 중창하였으나 우리나라를 침탈하려는 일본군과 맞서기 위해 의병이 봉기하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는 도중에 소실되었다.

그 뒤 학명선사가 월명암이 있었던 조금아래(현위치)에 중건하였으나 이 또한 한국전쟁 직전 여순사태가 일어났을 때 소실되어 그 후 옛 모습 그 형태로 다시 중건하였던 것이다.

대종사께서 83년전 월명암에 임시로 머무실 적에 법당 오른쪽 방에 기거하셨고, 학명선사는 법당을 큰방이라 이름하고 사용하였다 전해진다.

정산종사께서 학명선사의 상좌로 월명암에 계실때는 요사채를 사용하였으나 현재의 요사채 모습은 아니라 한다.

월명암의 모습이 1년여 후쯤엔 불사로 인하여 크게 변화 될 것 같다.

“월명암 법당을 옛터에 다시 중건하고 현재의 법당은 옆으로 아니면 아랫쪽으로 자리를 옮기면 사찰의 면모가 갖추어 질 것이다”고 주지스님은 말한다.

대종사님께서 기미년 말 변산 입산 당시에 월명암에서는 학명선사의 지도로 겨울 안거를 나고 있을 때였으며, 대종사께서도 잠시 안거에 함께 하셨다고 한다.

당시의 선원은 동운암 자리에 초가집에서 큰 방 2개를 봉래선원이라 이름하고 선방으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그 자리에 부설거사의 일가족이 성불한 것을 뜻하는 사성(四聖)선원을 크게 중창하여 선원의 맥을 잇고 있다.

월명암 인근에는 법인기도를 회향한 쌍선봉이 찬바람속에서도 옛일을 말해주고 정산종사께서 월명, 실상간 밤으로 오르내리셨던 정산로는 오늘도 한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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