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응철 교정원장
나는 장산도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 집 앞 바로 지척지간에 널직한 바위들이 흩어져 깔려 있고 그 동서 양쪽에 족히 삼백여미터는 됨직한 모래밭이 반원을 그은 듯 펼쳐 있었다.

나와 동네 꼬마들은 늘 바닷가 모래밭에서 살았다. 모래성을 쌓고 허물고 갯벌레를 쫓거나 아니면 물새 발자국을 세거나 물속에 텀벙 뛰어들곤 했다.

봄철이 되면 동네 어른들이 송아지에서 큰 소가 되기 전의 중간쯤 되는 소를 끌고 와 백사장에서 소 길들이기를 했다.

주인에게 회초리를 맞으며 좌로우로, 바로가기, 멈추기 등의 연습을 하느라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소의 코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소의 목 윗쪽에 멍에를 매고 무거운 짐을 끌고가려는 연습을 반복했다. 그것은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인욕의 훈련 과정이었다. 그래서 어린애들이 말썽 부리면 일렬로 세우고 ‘아이들도 소처럼 길들여야 사람된다'며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

어린시절의 이런 볼거리는 오래오래 남아 있어서 지금도 소를 보면 ‘피 흘리면서 고통스런 연습에 연습을 해 책임을 다하는 성우(成牛)가 되었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영산대학에서 초급교무를 할 때의 일이다. 우리가 부리는 소가 죽어 소 한마리를 사야 할 일이 생겼다.

그때 소 잘 고른다는 동네 아저씨와 머슴으로 있는 양섭씨와 함께 영광읍 우시장에 가서 이 소 저 소를 보고 또 본 끝에 튼튼하고 외모가 퍽 잘생긴 소를 사왔다. 몇일 후 양섭씨가 쟁기질을 시켜보고는 “길이 잘못 들여진 소"라고 했다. 그래서 결국 다시 물리는 소동이 벌어졌다.

길들여지지 않는 소는 육식용으로나 하지 일소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옆에서 지켜보시던 원장님께서 “사람이나 소나 길 잘못 들인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라고 평가하시면서 “겉만 보고 모르는 것이니 모두 겪어보아야 한다"고 훈계를 주셨던 일이 있었다.

나는 그 무렵에 틈만 나면 붓글씨를 썼던지라 자연스럽게 자호(自號)를 생각하고 있었다.

소에 관련된 일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소처럼 뚜벅 뚜벅가는 우보(牛步)라고 할까 아니면 장산도의 백사장에서 고생하고 길들여 가던 일이 생각나서 사우(沙牛)라고 할까 망설이다가 소처럼 길을 들여서 열심히 일하자는 뜻으로 밭갈 경(耕)자를 써서 경우(耕牛)라는 자호를 갖게 되었다.

요즘 나는 서투른 글씨를 쓰고 낙관을 할 때마다 ‘나는 내 마음소를 언제나 흰소(白牛)로 길들일 것인가' 반문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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