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수월스럽게 될것이다”

"정산종사는 사통오달로 학문이 깊으셧기에 어떤 손님을 접하시더라도 결코 화제가 궁해서 대화가 끊어지는 일은 없으셨고 어던 경우에도 극단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이타원 이정무 원로교무는 목포교당 재임시 장수수양원에서 요양하고 계신 정산종사를 뵙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여쭈었다.

“앞으로 세계적인 전쟁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허공법계에서 전쟁을 않기로 했는가 보더라. 앞으로 국부전은 있어도 세계전은 없을 것이다”

“남북 통일과 세계 평화는 어떠하겠습니까?”

“무위이화로 될 것이다. ‘우리 이러지 말자’하고 손잡을 날이 올것이다”고 말씀하였다.(《한울안한이치에》제1편 6장 돌아오는 세상)

이어 이 원로교무에게 덧붙여 부연해주신 말씀은 “지금은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중도사상으로 돌아오게 된다”며 “중도사상에 관심을 갖고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통일이 될 때는 아주 수월스럽게 쉽게 될것이다”고 말씀하였다.

영산성지(현재 영산원 자리)가 집이었던 이 원로교무는 철부지 어린시절부터 정산종사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정산종사를 아버지 처럼 여기며 자랐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정산종사님은 마치 신선 같았어요. 여름에 하얀 모시 두루마기에 하얀 중절모를 쓰시고 저만치 노루목 쪽에서 걸어오시는 모습은 흡사 이 세상 사람의 모습같지 않았지요”라고 그 당시를 회고한다.

정산종사가 총부에 기거하시면서 야회때 내려주신 법문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이 원로교무.

“그 집안이 잘 되려면, 부모가 지붕에다 소를 매라 하면 자식들이 두말없이 이에 따라야 한다”는 말씀과 “사람이 원만한 성품을 길들이려거든 음식도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하신 법문을 늘 가슴속에 간직하며 실천해왔다.

특히 소금장사로 번성한 한 집안의 후손들이 조상의 사당에 소금지게를 모셔놓고 선조의 정신을 기렸다는 예화를 드시면서 “근본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셨던 말씀은 일생을 전무출신의 본분을 잊지않고 살아온 보감이 됐다.

이 원로교무가 정산종사의 진지상을 올리고 물리는 일을 할 때였다. 저녁에는 숭늉으로 자리끼를 올려드렸는데 어느날 드시지 않은채로 남아 있어 그대로 가지고 나오려 하니 “그것을 그냥 내가면 구정물 통에나 들어갈 것 아니냐”하시며 윗물을 따라내시고는 밑에 가라앉은 누룽지를 잡수셨다 한다.

“정산종사님은 사통오달로 학문이 깊으셨기 때문에 어떤 손님을 접하시더라도 결코 화제가 궁해서 대화가 끊어지는 일은 없으셨고 어떤 경우에도 극단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요. 그 어른의 운심처사이셨지요.”

한번은 이 원로교무가 ‘인과’에 대해 여쭌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정산종사는 “인과는 삼세로만 보지말고 과거, 현재, 미래로 봐야 한다”고 하시면서 찰나전은 과거, 찰나는 현재, 찰나후는 미래이다”고 밝혀주었다.

또 한번은 평소 궁금했던 ‘영혼’에 대한 문제를 여쭈었을 때이다.

“영혼에 개령(個靈)과 대령(大靈)이 있습니까?”

“한기운으로 합하긴 해도 개령이 따로 있다”

“그럼 개령의 수가 정해져 있습니까?”

“정해져 있다”

“그 수가 얼마나 됩니까?”

“무량무수(無量無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점점 사람이 많아지나요?”

“진급기에 있으니 진급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하였다.

1932년 외가인 전북 진안군 마령에서 부친 이명진 선생과 모친 오순각 여사의 6남4녀중 장녀로 출생한 이 원로교무는 일산 이재철 대봉도의 손녀이며 원불교적 가풍과 법풍에서 성장했다.

원기34년 출가, 원기38년 공비 3기생으로 입학, 원기42년 원광대 교학과를 졸업하고, 목포교당으로 첫 발령을 받은 후 52년의 교역생활은 가는 곳마다 교화의 꽃을 피웠다.

특히 창의력과 교화활성화를 위한 정책들을 실천하여 왔으며, 신심과 공심으로 뭉친 삶이었다. 이 원로교무는 현재 퇴임후 수도원에 기거하며 수양정진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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