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역사박물관의 구관 2층에 들어서면 소태산대종사의 성상과 좌우에 대형 성화 2폭을 볼 수 있다. 소태산대종사탄생 1백주년기념 성업봉찬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개교정신도’와 ‘창립정신도’가 그것. 이 작품들은 1천3백호(5m×3.5m)가 넘는 초대형 작품이다.
정승주 화백(전남대 예술대)이 그린 ‘개교정신도’는 소태산 대종사를 중심으로 육도가 펼쳐져 있다. 죄고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중생들이 성혼에 귀의하여 평화 안락을 누린다는 내용을 형상화 한 것이다. “처음 부탁을 받았을 때는 주저되었지만 대종사님의 성적지를 많이 둘러보고, 생애와 철학을 듣다보니 차츰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정 화백의 종교는 가톨릭이다. 가톨릭의 많은 성화를 보며 자라온 터라 크게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구상 단계에서 교단의 원로와 실무자들이 계속 수정을 요구해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 화백은 그것이 창작의 침해라고는 보지 않는 듯 했다. 이질적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었고, 소태산이란 성자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저는 성인을 대할 때 인간적인 측면을 먼저 봅니다. 예수나 베드로, 야곱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보아야 시간이 흐를수록 성자적 존재가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신격화하여 접근하면 내면의 깊이를 느낄 틈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느낀 대종사는 서민들 속에서 함께 생활하며 선견지명을 보여준 평범한 성자라는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 성자적 자취를 뚜렷하게 했다고 한다.
성화제작의 동기는 5·18 광주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남대 총장이었던 민준식 교수가 신군부에 의해 밀려나 원광대에 몸담았던 적이 있다. 민 교수는 복권이 되자 전남대로 돌아갔고, 어려운 시기에 모두가 꺼려한던 자신을 받아준 원불교에 대한 빚을 항상 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시 김인철 소태산대종사탄생1백주년 성업봉찬사업회 사무총장과 조정근 교화부장을 영암에 있는 왕인박사 유적지에 안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교단 중진들이 대형그림을 보고 성화제작의 뜻을 비치자 민 교수가 적극 나서 정 화백과 호남대총장을 역임한 양인옥 교수를 소개한 것. 지금은 민 교수와 양 교수 모두 열반했다. 정 화백만 남아 대종사 성화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변색 정도가 달라 발색강도의 불균형이 보입니다. 박물관에 방습시설이 되어있긴 하지만 바니스 계통의 보호제를 뿌려야 보존이 됩니다.”
대형성화가 완성된지 12년이 지난 지금 작가는 작품에 대한 변색과 파손을 지적했다. 성업봉찬사업이 아니더라도 교단의 성화는 계속 늘어가고 역사가 더해갈수록 풍부해진 교단문화유산의 보존은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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