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각전 앞에 운집한 남녀노소 제자들 속에서 떠나는 영여.
▲ 이백철 종사와 박용덕 교무가 대각전 앞에서 발인 당일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이리읍내 천일고무 공장 앞을 지나가는 행렬.
▲ 천일고무 공장은 대한통운 창고가 들어섰다.
▲ 금강리 수도산 화장막에서 제자들이 최후의 묵도를 하고 있다.
▲ 화장막은 대명교회로 변했다.
▲ 신흥리 장자산에 안장된 ‘소태산 일원종사지묘’
▲ 장자산 묘 자리는 잡초만 무성하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원기28년(1943년) 6월6일,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이날 아침에는 비마저 뿌렸다. 이리병원에서 열반 후 조실에 안치된 대종사의 영구를 대각전으로 모셔왔다. 대각전 앞에는 일원기와 "佛法硏究會 創祖 少?山 一圓?宗師" 열반표기가 높게 솟아올랐고, 대각전에 마련된 발인식장은 생화와 조화로 장엄했다.

발인식

오전10시 유허일 선진이 사회로 발인식이 시작됐다. 고백문과 일동통곡 등 발인식을 마치고 오후 1시 장의행렬이 대각전을 출발했다.
일원기를 선두로 이공전 종사가 열반표기를 들고, 진영 인력거, 법사 인력거, 황은색 연화상여에 이어 그 뒤에 젊은 제자 55명으로 구성된 상여꾼들이 운구를 시작했다. 장의행렬에는 대종사께서 친히 내린 법의를 받은 2백30여명만 참석할 수 있었다. 6,7백명이 가량되는 나머지 대중들은 땅을 치며 통곡을 하니 총부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대각전을 빠져나온 장의행렬이 큰길로 접어들자 요령을 흔들던 김형오가 상여 위에 올라 "이 공부 이 사업을 잘하여 대성종사주에게 은헤를 보답함이 도리라 생각합니다. 굳은 결심을 하는 동시에 통곡을 그칩시다"고 외쳤다.
정복 순사 17명, 사복 순사들이 삼엄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순사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장의행렬을 재촉했다.

대각전 앞에 선 이백철 종사와 박용덕 교무

60여년전 영여(靈輿)가 떠난 대각전 앞(현재 왼쪽 벽)에 이백철 종사와 박용덕 교무가 그 날을 회고했다.(사진1)
당시 17살이던 이백철 종사는 그날의 일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선진 가운데 한 분이다. 3년동안 총부 방마다 불을 때고 나무 하는 일을 해 대종사님께 꾸중과 칭찬을 많이 들었단다. 그는 2백30여명에 끼지 못해 논두렁 밭두렁을 질러서 수도산에 가 화장막 안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박용덕 교무는 초기교단사 12권을 펴낸 인물로 대종사의 생애를 비롯한 초기교단 자료를 집대성 했다.
이백철 종사는 "3년이나 모셨지만 그때는 철이 안들어서 색신여래 밖에 못보았어요"라며 "대각전이 예전에는 꽤 높았어요. 그후 도로를 내면서 많이 깎았지요. 총부 앞 도로도 겨우 차 하나 지날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고 회고한다.

장의행로

장의행로는 현재의 도로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도로가 직선으로 뚫려 옛길이 뒤로 밀려났지만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총부 앞 도로를 거쳐 원대정문 앞 원광종이인쇄소 앞길을 지나 북일파출소 앞을 지나 삼양라면 가는 옛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길이 남아 있지만 꽃밭재(모현우체국 위 30m)까지는 길이 없어졌다. 별수 없이 도덕교육원 옆길로 해서 꽃밭재에 이르렀다.
박용덕 교무는 "꽃밭재는 예전에는 재라 부를만큼 고개길이었어요. 주막도 있었고. 이리역에서 총부에 오려면 제일 무서운 데였어요. 공동묘지도 있었지요"라고 말한다.
이리공고 정문을 지나 옛 남중파출소(남중교당 입구 삼거리)를 지나는 도로는 지금도 그대로이다. 새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여기가 주 도로였다.
유명한 천일고무 공장은 대한통운 창고로 쓰다가 지금은 유리가게가 자리잡고 있다. 진기획 옆이다.(시진2)
도로를 지나 신광교회 앞을 지나면 대전사거리가 나온다. 위로가면 시장이고 왼쪽으로 꺾으면 은성탕 앞이다.
박 교무는 "경찰서를 지났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없다. 바로 농림학교 옆길로 직행해 현 마동파출소 앞을 지나 주현동에 이르른 것으로 보인다. 수도산 정수장에서 이리읍내로 수도 파이프가 묻힌 길이다."고 말했다.
주현동 사거리에서 하이트소주 공장 앞 도로를 거쳐 고래등 오거리를 지나 원대제2병원 앞이 바로 화장막이다. 지금 나있는 도로 왼쪽 인도로 똑바로 선을 그으면 직선거리이다. 그 당시에는 주위가 논과 밭이었다고 한다.
이 종사는 "대종사 열반 관련 사진은 소화사진관 최씨라는 분이 찍었어요. 직업의식이 철저한 분이었지요. 지금 보아도 선명할 정도로 사진 상태가 양호합니다"고 말했다.
중앙총부에서 화장막까지는 5.6km 거리이다. 오후 3시경 마침내 수도산 화장막에 도착했다. 수도산(40m)은 닭뫼라고 하는데 이리읍내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수도산이라 했다. 화장막은 지금은 대명교회와 대룡서적 익산총판이 자리잡고 있다.(사진3)
묵도를 마치고 화장을 하기 위해 화구에 관을 밀어넣으려 했지만 관이 커서 들어가지 않았다.
이 종사는 "지름길로 해서 화장막에 도착해 일경의 제지를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관을 뜯으니 향내가 확 풍겼어요. 여름인데도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어요. 불룩했던 배가 쏙 들어가고 얼굴이 살아계신 듯 했어요"라고 증언했다.
성체를 화구에 넣고 정산종사가 점화를 했다. 점화 후 화장막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장자산 일원종사지묘
화장을 마친 유해는 조실에 모셔와 안치했다. 49재를 마치고 신흥리 장자산에 "少?山 一圓宗師之墓"라는 비석을 세우고 안장했다.
우리는 닭뫼를 지나 수로(水路)를 거슬러 왕지평으로 나가 장자산(45.8m)으로 향했다. 닭뫼에서 3km 떨어진 장자산은 1970년대 공단이 조성되면서 대규모 정수장으로 변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대략 위치를 추정해 보고 심고를 모셨다.(사진4)
이곳은 1949년 대종사 성탑이 건립되기 전까지 만6년여 모셨던 곳이다.
박 교무는 "교사에는 금강리 수도산이라고 되어있으나 신흥리 장자산이 맞습니다. 이는 이 곳에 사는 금강교당 이광중 교도회장이 해방 후 논에서 일을 하다보면 여자교무님들이 장자산에 참배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고, 수계리 출신 김조윤 원로교무도 총부를 가려면 장자산을 거쳐 갔는데 대종사 묘가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생사일여, 성속일여의 생애

대종사는 1924년 6월1일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열어 새 회상을 펴시다가, 1943년 6월1일 오후2시(未時) 이리병원에서 열반에 드셨다. 탄생한 시도 미시이니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만 할 것인가. 창립과 열반 날짜와 탄생과 열반을 같은 시에 했다는 것은 대종사가 생사일여의 소식을 전하려 함이 아니었을까.
또한 창립한 보광사나 묻힌 장자산, 법을 펴신 중앙총부는 산도 들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다. 대종사는 높지 않은 곳에서, 그렇다고 세속에 물들지도 않는 개벽시대의 활불상을 보이다 가신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성역화 작업 서두르자.

열반 60주년을 맞아 대종사 장의행로와 이리병원-장자산-보광사를 잇는 코스를 도보순례 해보자. 이 땅에 오신 성자의 체취를 가슴에 담고 "하나 하나 먼저 깨치는 사람"이 되어보자.
이와 함께 대종사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익산지역을 성역화 하는 작업도 서둘러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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