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진영 도무
▲ 전국 최초의 대안중학교인 교립 영산 성지송학중학교 전경.
우리나라 대안학교의 모델이 되었던 전남 영광의 영산성지고. 곽진영 도무는 그 초창기부터 역경을 감내하며 오늘의 교단 대안교육 환경을 일구고, 전국 대안학교 정책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대안학교의 모델 영산성지고

제도권에서 대안학교를 수용하기까지는 청소년 문제가 곪아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된 뒤였다.

1996년 2월 MBC에서는 청소년 문제에 대한 13시간 특별 생방송을 내보며 유일한 대안교육 장으로 영산성지고를 지목했다. 당시 안병영 교육부 장관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영산성지고 지원을 약속하고 현장방문과 더불어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1997년 4월 교육인적자원부의 실무진이 영산성지고에 숙식하며 입법작업을 하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특성화학교로 분류되며, 그 안에서도 학교에 대한 각종 제재 조항이 삭제된 ‘자율학교’라는 이름으로 시행령이 만들어 졌다. 영산성지고는 1997년 10월 17일 국내최초로 이 법에 의해 자율학교로 지정되어 이후 개교하는 대안학교들의 시발이 되었다.

존폐의 위기를 극복하며 그가 고난을 함께하며 일구었던 영산성지고가 국가 입법의 모델이 되고, 교단 대안학교·전국 대안학교의 붐을 일으켰으며, 나아가 국가 교육의 변화를 가져온 셈이다.


존폐의 기로에서

영산성지고를 일구었던 그는 현재 전국 최초의 대안중학교인 영산 성지송학중학교를 세워 교감으로 재직중이다.

그가 대안교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5년. 김현 교무(원광대법당)가 1983년에 각종학교(시설에 관계없이 정규학력인정 학교)로 인가를 받아 운영하던 영산성지고는 2년 뒤 원의회로부터 폐지 결의를 받게 된다. 실험학교에 대한 부정적 반응 때문이었다. 이에 김 교무는 원의회 의원들을 설득하였고, 당시 출가를 앞둔 곽 도무를 불러 이 학교를 맡기게 되었다. 곽 도무의 대학시절(전북대) 공심야학과 전주소년원 활동 등에 신뢰를 가진 김 교무의 선택이었다. 곽 도무와 대안학교의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첫 월급 3만원으로 맡게된 영산성지고는 그에게 고난의 눈물과 굳건한 결의를 동시에 안겼다. 먹거리가 없어 들판의 나물을 뜯어 장에 비벼먹고, 잘 곳이 없어 책상을 모아 자다가 떨어져 이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이런 경제적 문제에다 1990년 영산대를 만든다는 교단발전 논리에 밀려 완전히 학교부지가 사라져 버렸다. 폐교된 길룡초등학교가 있던 현재의 터로 영산성지고는 밀려났고, 그나마 전남도의 야외학습장으로 쓰인 이 자리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기막힌 존폐의 기로에서 곽 도무는 대산종사를 찾았고, 대산종사는 그를 위로하며 부지매입비 1억 7천만원을 주어 터를 확보하게 되었다.


대안학교, 본래 취지 지켜야

곽 도무는 전국대안학교협의회장이다.

현재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정식 인가한 제도교육형 대안학교는 영산성지고 등 교단내 4개 학교를 포함해 전국에 14개교가 있다. 각종학교에서 제도교육형 학교로 들어오면서 대안학교의 본래 취지를 상실해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대해 그는 단적으로 말했다.

“재정·행정·제도적 지원으로 교원 수급이 안정적이고 더욱 좋은 교육을 펼쳐갈 수 있고, 모든 제재조항이 풀린 ‘자율학교’로서 특례적용을 받기 때문에 기존의 취지를 그대로 살려갈 수 있습니다.”

교단내 대안학교와 다른 대안학교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말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대안학교가 본래 취지와 목적대로 가고 있느냐입니다.”

두레·푸른꿈·한빛학교 등은 우수학생을 뽑아 영재교육을 시킨다거나 생태교육과 같이 어느 한 분야만을 특성화하는 등 사각지대를 보완한다는 대안교육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즉, 교단내 대안학교는 부적응아, 중도탈락자를 위한 종합적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대안학교는 지적 영역의 교육 비중이 높은데 반해 교단내 대안학교는 마음공부를 통한 정서와 인성의 비중을 높였다는 것이 두드러진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현재 정부의 정책은 대안학교를 계속 늘린다는 방침이다.

교육인적자원부의 자료에 따르면 정규학교 부적응 학생이 매년 6∼7만명이 나오고, 고교까지의 학령기 비학습자가 2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교육인적자원부는 기존 시설에 소속되어 있는 비인가 학교라도 대안학교를 늘려간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정규학교에도 대안교육 프로그램을 적용시켜 10%정도가 대안교육화 하는 등 공립학교의 대안교육을 확대해 갈 방침이다. 이를 위해 대안교육기관의 프로그램 평가, 위탁교육기관의 재정지원등도 아우를 예정이다.


품과제도의 합리화 필요

그는 원기82년 전무출신 품과제도가 생긴 2년뒤인 원기84년 도무자격을 취득하였다.

“도무는 전문기능을 가지고 전문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도무제를 시행하게된 이유도 교단내부 일에 전문성을 극대화하자는 것이구요. 하지만 전문인력이 출가자로서 도무 승인된 이후에 동일 직종내에 근무하더라도 예전보다 직위가 낮아져 사기가 저하되는 경우가 많고, 해당 전문직종에 근무시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무지원을 했던 사람들은 나이나 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출가이후 가장 낮은 단계인 5급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관계로 종전보다 인사상 불이익을 받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무는 교무와 달리 나이와 경제력,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던 상태이기 때문에 출가직후 갑작스레 지위와 경제력이 낮아져 적응하는데 힘이 든다는 것이다.

도무 출가자에 대해 전무출신 급수를 그대로 적용하는 인사관행을 벗어난다면 품과제도의 원래 정신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본인의 상황과 기존 도무들의 뜻을 대변한 것이리라.

젊은 원불교의 가능성

그는 역시 교사인 김영옥 정토와의 사이에 딸 현과 아들 태호를 두고 있다. 현과 태호는 중학생과 초등학생이다. 영산이라는 자연속에서 대안학교 학생들과 어울려 자라는 그들에겐 해맑음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어린이의 명랑함 속에 분명한 예절이 깃들어 있고 매사에 긍정적인 현과 태호를 보며 과연 대안교육의 전문가답게 자녀들을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를 다니던 곽 도무는 원기60년(1975) 친구였던 이진수 교무(나포리선교소)를 연원으로 입교하였다. 대학시절 야학에 온통 정열을 쏟고, 고독했던 대안교육의 외길을 가다가 뒤늦게 미뤘던 출가를 한 곽 도무. 치열했던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나라 대안교육의 제도적 정착을 가져왔고, 교단이 교육을 통해 사회를 이끌 기반을 마련하게 했다.

푸르른 그에게서 젊은 원불교의 가능성이 또 하나 발현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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