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이 구비한 법도있는 생활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는 지공무사한 성품이다. 이 지공무사한 심지가 경계를 따라 성품 그대로 순발(順發)되면 덕으로, 법으로 화하여 정의의 은혜가 나타나고, 역발(逆發)되면 그름으로 그 해악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 그름이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는 수행을 하자는 것이다.
지공무사한 본래 성품은 모든 것이 중도에 어긋남이 없다. 그러나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에 의해서, 시비를 모름에 의해서, 길들여진 습관에 의해서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다.
지식정보의 시대가 만개하고 있는 요즘은 무지에 의한 잘못보다는 자신의 기본적 욕구를 스스로 제재할 수 있는 자재의 힘이 부족하고, 앎을 실천할 수 있는 실천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름이 일어난다.
가끔 미래의 인간을 묘사한 것을 보면 머리는 크고 팔다리는 아주 빈약하여 비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말이나 글은 많지만 실천력이 겸비한 사람 즉 난 사람은 많으나 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정의행의 판단과 결단 기준은 솔성요론과 계문, 보은조목

작업취사의 목적에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 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에 돌아갈 뿐이요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나니, 예를 들면 줄기와 가지와 꽃과 잎은 좋은 나무에 결실에 없는 것과 갔다 할 것이나라.’하셨듯이 결단과 실천의지가 없이는 공부의 실효를 거둘 수 없다.
자성의 계를 세운다는 것은 그 일 그 일에 정의는 결단있게 취하고 불의는 결단있게 놓아버리는 공부를 통해서 지공무사한 본래 성품과 합일된 삶을 살자는 것이다. 이 실행의 힘에 의해서 만덕이 구비한 법도있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성의 계를 세우는 표준은 솔성요론16조와 계문이다. 그름의 경계가 왔을 때 정의행의 판단과 결단의 기준은 솔성요론과 계문이다. 또한 보은조목이 그 기준이 될 것이다.
법도있는 생활은 본래 지공무사한 성품을 세우는 것으로 교법에 의해 판단과 실천의 기준점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래서 그 표준를 바로 세우고 참고 견디고, 끊고 고치고, 하나하나 실천하고, 반복적인 훈련에 의해서 법도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질의 변화나 법도있는 생활은 끊임없는 정성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대산종사께서 즐겨 표현하였던 ‘평떼기’나 쉼없이 하라는 ‘억만번’이라는 숫자는 지성으로 반복 훈련을 하라는 의도이다. 그래야 중심을 잡고 중도를 알아서 중화를 이룰 수 있는 자성의 계를 세우게 된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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