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원형 덕무/임피 보은의 집
원기67년(1982), 남원교당에 계시는 어머님을 뵈러 갔다. 최덕신 교무의 소개로 무산 장성진 원로교무를 만나 중앙총부의 종두로서 아침저녁 범종과 심고 목탁을 치면서 출가의 첫 길이 시작되었다.

중앙총부 종두
늦잠을 자다 범종을 제시간에 치지 못해 아침공양 거르기를 밥먹듯 했다. 첫 봉급이라는 명목으로 용금 8천원을 주기에 하도 어이가 없어 책상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그 다음달도 또 8천원을 주어서 책상 서랍을 열다 ‘아! 여기는 돈이 없어도 사는 곳이구나 참 이상한 곳도 다 있다. 이곳은 다른 세계의 삶이구나. 열심히 한번 살아 보자’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매일 범종을 치던 어느 날 종을 치다 문득 머리속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반딧불 밝다고
춤추며 뛰놀지 마소
반딧불 천인들
양촛불 하나만 하리요
양촛불 밝다한들
제 앉은자리도 못 보거늘
어이 밝다 하리요
양촛불 백인들 천장에 매인 전등불 하나만 하리요
전등불 밝다고 자만하지 마소
중천에 뜬 태양
그대보기 민망하여
구름새로 숨는구려
태양이 밝다한들
티끌 중생마음 어찌 비추리요
우리님 밝혀주신 일원대도
저 밝음이 참 밝음인가 하노라

그 때부터 교전을 하나하나 읽고 뜻을 새기며 원기68년(1982) 전무출신 서원을 세우고 영산선원에 들어갔다. 그 해 고등학교 졸업자는 27세 미만이라는 제도의 틀에 묶여 교무의 뜻을 접고 영산선원 2년을 마친 뒤 봉공직 전무출신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심과 길
영산선원 수학시절, 뜻하지 않는 허리디스크로 병원생활이 잦았을 때 참으로 안타깝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짧은 2년 동안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져가야 할 것인가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다.
오직 하나의 의지처였던 옥녀봉을 오르내리면서 기도를 틈틈이 하던 어느 날 옥녀봉에서 정관평을 내려다보며 ‘아 이것이다’하고 한 생각 떠오른 것이 ‘신심’이었다. 신심 하나면 출가자로서 어떤 경계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원의 진리 찾아
가시밭길 헤쳐간다.
희망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숙세에 얽힌 아픔의 날들
그 노래는 그치고
이제 단 하나의 일원상(○)과
스승 동지 이정표 삼아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는 내 것이 아니면서
결코 내 것이라 함을
그 모든 것의 부조리
창공에 날려 보내고
반야대지 가는 것이다.

영산선원을 마치고 다시 총부 상주선원에 근무하며 대각전 종두로 2년을 더 살게 되었다. 허공 중생들을 깨우며 숙세의 업을 모두 마치라는 뜻을 깊이 새겼다.

나를 놓는 생활
원기73년(1988) 교화부로 발령을 받아 근무를 하며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원만한 생활을 할까’를 고심하게 되었다. 상없는 마음 나를 놓아버리는 생활, 그것이 원만한 생활임을 근무하며 깨닫게 되었다.

무상(無相)
산은 만물의 보금자리를
제공하면서도
항상 침묵을 잃지 아니하고
물은 만생물을 기르면서도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며
해와 달은 천지를 비추되
덜함도 더함도 없으며
바람은 산과 내를 지나고
춘하추동 사시를 운행하되
형상을 남기지 않으며
성현은 만 중생을 구원하되
구한다 함이 없나니라

13년의 교화부 생활을 하고, 원기85년(2000) 삼동야학을 다니며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현재 보은의집에 근무하며 원광보건대 사회복지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큰 딸(조태륜)이 뒤를 이어 출가하여 영산원불교대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니 무엇보다 대견스럽다.
이 회상에 한 몸 바쳐 후회없는 성직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많은 스승, 동지들을 이정표 삼아 보은의 연화를 피워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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