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운동가 송봉원교도

▲ 송봉원 교도
농민운동의 야전 일꾼
수계교당 송봉원 교도는 낳고 자란 그곳에서 손수 농사를 짓는 한편 농민의 권익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농민 운동가이다. 전북대 공대 3학년 때인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한달간 구금되면서 소위 운동권이 됐다. 1982년 졸업과 동시에 농민운동에 뛰어들면서 80~90년대 시대의 아픔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농민의 아들로 농업 문제를 방치할 수 없었죠. 내가 낳고 자란 농촌에 남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984년 농민·종교운동 연합단체인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활동을 시작으로 기독교농민회에 가입했다. 당시 농민운동 단체는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밖에 없던 시절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농 전라북도 홍보선전부장, 교육부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89년에는 기농 총연합 홍보선전위원장을 역임하기도. 91년에는 농민운동 통합단체인 전국농민운동연합 완주군농민회 총무로, 94~96년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연합 정책위원장 겸 완주군농민회장으로 활동했다.

원불교 토박이
그는 원기54년 아버지(진산 송남진)를 따라 수계교당에서 입교, 학생회와 청년회를 다닌 원불교인. 1987년에는 원대연 훈련에 강사로 초청돼 강연한 것을 계기로 원대연 지도고문·원청사회교화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원대연 부회장이었던 아내 강명희 교도를 만난 것도 이때이다. 아내 역시 전북여성운동연합 노래패인 청보리사랑합창단장을 역임한 운동 동지이자 도반. 아내는 수계교당 법회 사회를, 본인은 수계교당 청운회장을 맡고 있다.
현재 그의 대외 직책은 전국농민연맹(약칭 전농) 전북도연맹 고문이다. 1996~1998년에는 전북도연맹 의장을 역임한 후 현장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상태이다. 동생과 20필지 되는 논농사를 하고 있다.
“재충전하고 있습니다. 20여년 운동 현장에 있다보니 자기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내년쯤 연구소를 운영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고 밝혔다.

잘못된 농업정책
그는 정부의 농업정책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농축산물 수입개방과 농업의 축소조정 정책이 공업위주의 불균형 경제성장 정책과 맞물려 전체 국민의 삶, 나아가 민족의 운명을 암담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안으로 식량자급형 농업, 소득보장, 환경보전, 통일대비형농업 등 4가지를 제시했다. 불안한 세계 식량사정과 통일에 대비하여 식량안보체제를 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농산물 수입을 반대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다른 나라도 농업을 시장에 맡기지 않습니다. 미국도 30년전부터 농업 육성정책을 펴고 있고 유럽도 식량 확보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농업은 공업에 비해 생산성 발전이 더디고 한번 생산기반이 파괴되면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진각국은 자국의 농업보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농업을 보호하기는커녕 미국과 독점재벌의 이해에 따라 우리 농업을 파괴하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농업을 살리려면 먼저 농산물 가격 보장과 유통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자연재해에 대한 보상제가 실시되어야 하며 도시와 농촌이 직거래하는 유통체제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고 있다고 한탄한다.
“일본의 경우 농협이 35%를 맡고 있고, 대만만 해도 생산과 수요를 예측해 출하조절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잘 되지 않아요. 농민들도 각성할 부분이죠. 폐기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있으니 힘이 모이지 않습니다”고 말한다.
농민이 가공산업을 하는 것도 한 방안이지만 기준이 너무 까다로운 것도 걸림돌이란다. 전통장류와 같이 소규모 산업도 인정해주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원불교 농민회 필요한 시점
그는 농촌교화에도 관심이 많다. 작년 3월 열린 농촌교당 교무 연수회에서는 ‘도시교당과 농촌교당의 연계사업,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열린 교화, 노령화 사회에 대비한 건강교실·상담실 운영, 농촌교당 협의기구 구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교당 동지 가운데 원불교농민회는 없느냐고 물어오는 후배가 있었다”며 “원불교농민회 같은 단체도 필요한 시점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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