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타원 김명환·수산 이철원 대호법 부부

▲ 만타원 김명환·수산 이철원 대호법 부부
여기가 종로구 화동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花?)145-2번지. 서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기가 맑다. 가을비가 내려서 그런지 더욱 상큼하다. 만타원 김명환(滿陀圓 金明換) 종사와 수산 이철원(修山 李徹遠) 대호법이 이곳에서 수양중인 집이다.

‘화동침구 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구나.’ 생각하며 부부를 만났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처음 뵙는데도 편안함이 전해온다. 만타원 대호법은 화동이라는 동네 이름만큼 꽃처럼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

교단적으로 부부가 대호법에 오른 분들이 여러 분 있다. 하지만 수산·만타원 부부만큼 복과 혜를 두루 갖춘 부부는 드문 편이다. 수산 대호법은 오랫동안 종로교당 교도회장을 역임하며 교당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부부는 원기73년 함께 대호법위를 받았고 만타원은 원기85년 종사위에 올랐다.

기도로 쌓은 적공

만타원은 현재 당뇨로 고생 중이다. 많이 아프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얼굴이 맑았다. 오랫동안 기도하며 닦아온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청아함이 느껴졌다. 지금도 매일 저녁 기도를 모신단다.

“기도를 모시지 않으면 잠이 안 와요”라고 말하는 만타원. 그래서 만타원이 기도를 모시는 기도실은 항상 불이 밝혀 있다. 일원상과 대종사·정산종사·대산종사님이 모셔진 커다란 기도장에는 대산종사님과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한 구석에는 《정산종사 법설》이 펼쳐져 있다. 만타원은 “법설이 너무 좋아았어요”라고 수줍은 듯 말한다. 1931년생이니 72살이라고는 못할 정도로 단아하면서도 소녀같다. 그러면서도 꽉 차 있는 느낌을 주니 만타원이란 법호가 딱 어울린다

만타원에게 기도는 곧 생활 그 자체였다. 종로교당 교무였던 예타원 전이창 종사의 인격에 깊은 영향을 받아 기도로 힘을 얻었다.

둘째 딸을 잃고 힘들어 예타원님에게 “큰아들을 팔겠다”고 하니 예타원님 “법신불 전에 팔라고 해서 파는 기도를 했다. 이때부터 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법신불전에 기도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일원상서원문을 지성으로 외우며 아닌 마음을 씻어내는 속깊은 공부인이다.

수산 이철원 대호법은 “대산종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기도할 때는 기도문이 적힌 두터운 종이가 다 닳을 정도였어요”라고 거들었다.

세계교화의 전진기지 하와이국제훈련원

만타원은 현재 6개월은 하와이에, 6개월은 서울에서 머물고 있다. 하와이는 만타원에게 특별한 곳이다. 20여년전 대산종사님께서 세계교화의 관문으로 하와이를 점지하자 기꺼이 동참했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만타원은 작년부터 서울 시민선방과 새삶회가 하와이 국제훈련원에서 시작한 국제훈련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하와이에 국제훈련원을 설립한 대산종사의 뜻을 받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만타원은 예비교무들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작년에는 최희공 원무와 함께 예비교무 10명이 ‘대산 종사 다녀간 뜻’을 기리며 훈련을 났다. 올해에도 7월30일부터 8월6일까지 ‘정전실습공부로 세계교화 열어가자’는 주제로 청년·일반·예비교무 30여명이 참여했다. 올 훈련에는 이철환 대호법도 함께 했다.

만타원은 훈련이 끝난 후 좌산종법사의 미국 순방에 동행했다. 좌산종법사는 7월23일부터 1주일간 하와이에 머문 후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개교식과 LA봉불식에 임석, 미주교화에 힘을 실어주었다.

만타원은 대산종사께서 말년에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하와이를 방문, 기원문 결어를 공표하며 세계교화의 염원을 담은 뜻을 가슴에 담고 있다. 대산종사가 하와이를 세계교화의 전전기지로 삼은 것은 앞으로의 세계역사가 밖으로 뻗기만 했던 ‘지중해의 역사’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태평양 중심의 역사’로 전환하려는 기미를 포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본토와는 달리 종족의 차별이 없고 태평양의 관문에 있는 하와이는 적지였다. 만타원은 대산종사의 이런 염원을 알았기에 하와이에 각별한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이다.

서울 시민선방

서울 종로구 사간동 108번지에 자리잡은 서울 시민선방은 원기73년 수산 대호법과 만타원 대호법의 희사로 설립됐다. 화동 자택과 그리 멀지 않은 이곳은 ‘절골’이라 하는 곳으로 지금도 법련사 등이 자리잡고 있는 유서깊은 터.

사실 이 집은 만타원의 의지가 없었으면 시민선방으로 활용하지 못할 뻔 했다. 수산 대호법은 “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만타원이 꼭 쓸데가 있다면서 절대 팔면 안 된다고 했어요. 결국 제가 졌죠”라며 웃는다.

결국 서울 시민들과 재가출가 교도들에게 정신의 안식처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좌산종법사(당시 종로교당 교무)의 뜻을 받들어 희사하게 됐다.

만타원은 동지들과 함께 매일 선방에 나가 아침 90분, 낮 2시간씩 정진을 했다. 만타원은 “그 때 동지들과 참 재미있게 공부했어요”라고 회고한다.

화동침구와 교단사업

화동침구하면 방석이 떠오른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예전에는 봉불식을 거행하는 교당마다 으레 화동침구에서 보낸 방석이 있었다. 화동침구를 운영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고 한다. 30대 후반 못다 이룬 학문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 어학연구회에서 공부를 하다가 만난 동료의 권유로 화동침구를 경영하게 됐다고 한다. 만타원의 오랜 동지인 평타원 백기덕 종사가 운영을 맡아 큰 도움을 주었다. 만타원은 위아래 사람을 모시고 거느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늘이 크고 겸허하므로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움이 넘쳐 흐르는 물 같은 심법을 갖추었다.

화동침구는 새 회상 창업의 후원사업체였다. 수익은 모두 교단 사업에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산 대호법은 “수익 뿐 아니었어요. 만타원은 교단 일과 집안 일을 둘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예요”라고 말한다. 종로교당 이선종 교무는 “대산종사님께서 ‘명환이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명환이 마음이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부부의 교단사업은 동산선원 본관 신축을 비롯 중앙훈련원·영산선원·삼동원·뉴욕교당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기자는 ‘어떻게 이런 마음이 나왔는가’ 궁금했다. 기자의 질문에 만타원은 “사업을 하면 신심이 절로 나와요. 큰 신심이 나도 큰 사업을 할 수는 없지만 사업을 하면 큰 신심이 나는 것이지요”라고 단호히 말한다. 다른 말 할 때는 천천히 말하다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신심과 공심을 다해 얻은 체험에서 나온 신념이었기에 그만큼 감화가 클 수 밖에 없다.

만타원은 타고난 보시심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주기를 좋아했던 만타원은 대도정법을 만나 자력이 세워지자 오직 도덕사업을 위한 보은생활을 보람으로 여겨왔다.

이선종 교무는 “3남3녀의 자녀 모두 일원가족입니다. 다복한 분이죠. 세딸은 모두 종로교당의 알뜰한 교도이니 참 복족족 혜족족한 어른입니다"고 말한다.

병고 속에서도 공부심으로 살아가는 만타원 종사와 그런 만타원을 지켜보는 수산 대호법의 모습에서 이 공부 이 사업으로 살아온 이의 넉넉함이 엿보인다. 배웅할 때 멀리 북한산 인수봉 큰 바위가 다가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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