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건축문화 정립이 마지막 숙제”

원불교 건축심의위원회 상임고문이자 (주)그룹한건축연구소 사장인 김한일 교도(법명 진환, 58, 개포교당)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서울의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일주일이면 이틀씩 총부에 내려온다. 전국 각 교당에서 올라오는 설계도면을 심의하고, 익산 영등동 보화당한의원 신축공사 현장 등 여기저기를 들러보고, 건축에 문제가 생긴 현장을 찾아 해결방법을 제시해준다.

건축 닥터
그는 건축 닥터이다. 의사가 환자의 아픈 곳을 찾아 처방하듯 그는 건물의 이상을 찾아 해결책을 제시한다. 환자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찾아 제대로 치료하는 의사가 유능한 의사이듯 그는 건물의 잘못된 곳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가히 건축 닥터라 할만하다.

습기가 차 도배를 몇번씩 해도 엉망이던 모 교당 유치원을 환기통 몇 개 달아 말끔하게 고친 일이나 익산약국 건물을 골조보강해서 새 건물로 탈바꿈시킨 사례 등 부지기수이다.

원불교 건축심의위 상임고문
그의 교단내 직함은 원불교 건축심의위원회 상임고문이다. 교당에서 올라오는 설계도면을 심의하는 일이다. 대부분 설계가 확정된 후에야 심의를 하게돼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한다.

“설계 후 심의를 할 것이 아니라 계획단계에서부터 심의를 해야 우리 정서에 맞는 건물을 지을 수 있고 돈도 절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금년 경남교구 남지교당을 설계했다. 교당 설계는 원기72년 개포교당 신축공사에 이어 14년만의 일이다.

남지교당 취재차 들른 기자의 눈에 비친 남지교당은 두 번 손볼 곳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편리한 구조로 설계돼 있었다. “누가 설계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한일 교도가 설계했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총부에 돌아와 김장원 재정부원장님에게 물어보니 원불교 건축심의위 상임고문이며 개포교당 교도라고 일러준다. 그러면서 “내가 무심해서 몇십년동안 일만 시키고 한 번 소개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를 취재해보니 재정부원장님이 무심한 탓이라기 보다는 김 교도가 워낙 겸손하고 드러내기 싫어하는 성격 탓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주)그룹한건축사사무소 사장
그의 사무실은 서울 선릉역 옆 상제리제센터에 있다. 그룹이란 말이 붙는 이유는 건축사사무실과 무역회사인 BMJ그룹과 인테리어 등 세 개 회사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외적인 직함은 한국건축가협회 실내분과위원장·이사이다. 그는 특히 실내장식에 관심이 많다.

“외국에서는 실내장식도 면허가 있어야 한다. 면허제도가 없으니까 우리나라는 건축을 모르는 사람이 실내장식을 하다보니 문제가 많이 생긴다”며 “건축도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의사가 잘못하면 한 사람만 잘못되지만 건물이 잘못되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적어도 기본적인 지식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경기대학교에서 실내장식업자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건축 철학 - 건강한 집
그의 건축철학은 확고하다. “건강한 집을 짓는 것이다. 환기가 잘 되고 습기가 차지 않으며 비가 새지 않아야 한다. 자연 대류가 되도록 하고 적절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다”고 강조한다.

“총부에 짓고 있는 찻집도 습기가 차지 않도록 완벽하게 공사하겠다. 법은관 식당도 내년 봄에는 환기가 잘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오래된 건물이라고 무조건 부수고 새로 짓는 것에 반대한다. 리노베이션만 하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 많다는 것이다. 서울회관과 원로원 옆에 있는 동심원 건물이 대표적인 경우.

원불교 문화회관도 내년에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에 들어간다고 한다. 내년에는 새롭게 단장한 문화회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명덕 대호법 영향으로 개종
그의 고향은 전주. 의사가 되라는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고 홍익대 미대에 진학한다. 2학년 때 공대 건축공학과로 전과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미학과 색채학에 밝다는 평을 받고 있단다.

대학에 입학해 아내이자 도반이며 건축가인 김영종 교도(호적명 복수, 개포교당)를 만났다. 김영종 교도는 한국여성건축가협회장을 맡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 건축가이다. 장모가 바로 서타원 故 김명덕 대호법(양정교당)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기독교이었던 그가 개종을 한 것은 순전히 장모인 김명덕 대호법의 심법 때문이었다. 장모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님(대호법을 꼭 어머니라고 불렀다)은 제 스승님이셨어요. 지혜로우신 어른이셨죠”

화려한 경력
대학 재학 중에는 국전 건축 분야에서 3년 연속 대상을 받을 정도로 그의 건축 실력은 출중했다. 정주영 회장이 그를 스카웃해 재학중 금강슬레이트에 적을 둘 정도였다.

국민대 대학원을 나와 미국계 회사에 잠시 근무하다가 귀국, 국회의사당 건축 총지휘를 한 후 청와대에 들어갔다. 경주 보문단지와 제주 중문단지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후 건설회사를 운영하다가 한건축사무소를 열었다. 지금까지 해태제과 사옥, 한국여성개발원 등 4~500개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아직 맘에 드는 작품이 없다고 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이다.

교단과 사회에 환원
그가 요즘 관심 갖는 일은 교단 일과 건축가협회 일이다.

교단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한편 후배 건축가들의 자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한편 모교인 홍익대에서 학생들에게 그동안의 경험을 가르치고 있다.

“WTO가입으로 몇 년안에 외국 건축가들이 대거 진출하게 되고 국제인증건축제도가 도입된다. 한국건축가협회·한국건축사협회·한국건축학회 3개 단체가 하나로 통합, 대비를 하고 있다”며 “제가 배운 것을 회상과 사회에 환원하느라 바쁘지만 기쁘기만 하다”고 말했다.

원불교 건축문화 정립
원불교 건축문화 정립은 그의 마지막 숙제이다. 아직 우리다운 유형이 없어 아쉽단다. 그렇다고 획일적인 양식을 제시할 수도 없단다. 지형과 여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상징탑을 통일하는 것도 과제라고.

“외국 건물을 흉내내는데서 벗어나 원불교 정서와 사상에 바탕해 원불교 건축다운 건축 문화를 정립하는 것이 마지막 숙제입니다. 가능한 데서부터 전통건축과 현대기술을 조화하는 작품을 남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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