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신 교무 (만덕산 훈련원장)

대산종사는 “정산종사께서 남북통일이 되기 전에 인재 만명을 길러놓아야 되니 인재를 길러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양신이 네가 천명만 길러라” 하셨다.영산선원 재직시에 대산종사께서 영산에 오셨을때 원광원(현 영산수도원) 언덕에 보리수 나무 세 그루를 손수 심으시면서 “천지인(?地人) 삼재(三才) 직수(植樹)라” 하시며 “이 보리수 세 나무에서 보리수 알이 일년에 만개씩만 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보리수 알처럼 인재가 만명이나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교동교당 부교무 시절 그 당시 고3인 학생을 데리고 금강리에 계시는 대산종사를 뵈러 갔을 때 대산종사는 “나는 세세생생 대종사님을 모시고 살 것을 서원했다. 그래서 내가 서울에서 생사위경에 처해 있을때도 세가지 기쁨을 가지고 살았고 앞으로 이 기쁨만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 세가지의 기쁨은 첫째는 한국에서 태어난 기쁨이고, 둘째는 대종사님을 만난 기쁨, 셋째 는 전무출신한 기쁨이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대산종사의 그 뜻을 받들어 그 학생은 출가를 했다. 원평교당 교무시절 대산종사는 “1년에 교도 1백명 교화하는 것 보다 인재 다섯명씩만 기르는 것이 더 큰 일이다.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그 뜻을 받들려고 노력 하다보니 강보광 덕무, 강이중 덕무, 고도길 덕무, 장수인 교무, 최경수 교무, 장형규 교무등이 출가를 하게 되었고 모두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늘 반가운 마음이 든다. 삼동원 재직시에는 윤대원 교무가 고시 준비를 하러 왔었는데 “검사, 판사되는 것 보다 도인이 더 중요하니 출가를 하라”고 권했고 대학원 시험 준비하러온 이혜화 교무에게도 “대학원 가지 말고 출가를 해서 해외로 가면 좋겠다”고 권했으며, 취업 준비 하러온 정승원 교무에게도 전무출신 하라고 권했더니 출가를 하게 되었다.제주국제훈련원 재직시, 그 당시 원대연 지도교무인 김관진 교무가 10기 대학 선방을 제주로 가고 싶은데 훈련비가 없다기에 1백명만 데리고 오면 7박8일간 무료로 훈련을 시켜주겠다고 했더니 1백명을 데리고 왔고 나는 그중에서 5%만 출가를 했으면 하는 염원을 올리며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전흥진·이경진·신도현·민요달 교무와 이지은 예비교무등이 출가를 하였고 그다음 대학선방에서도 ‘언제 천명을 출가시킬꼬’ 하였더니 이인광, 이성심, 윤선중등이 출가를 하였다.시민선방 재직시 전상현, 정민주(이상 두명은 미주 선학대학원), 노현성, 조성주, 이현인, 구덕경, 이대진, 오성등의 예비교무가 출가를 하여 공부하고 있는 것을보니 그저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대산종사는 “공자님께서는 인재를 기르는 것 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다”고 하셨다며 “가문에서는 가문의 후계를 길러내야 하고 국가에서는 국가의 동량을 길러야 하고 교단에서는 교단의 후진을 길러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런데 힘들다고 가슴 아프다고 인재 기르는데 방심했으니 그저 대산종사님께 죄송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이 일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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