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병원 간호부장 노성자 교무
흰 저고리 검정 치마 간호사

▲ 노성자 교무
“원불교의 사활은 원광대요, 원광대의 사활은 원광대병원이다.”

숭산 박길진 총장이 당시 한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노성자 교무는 원불교 성직자이자 원광대병원 400여명 간호사의 맏언니로 잔잔한 삶을 일궈가는 사람이다. 인자하고 넉넉함이 가득한 미소는 있던 병도 나을 듯하다. 세밑 엄동설한에도 병원을 찾은 환자 보살핌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동화병원 시절의 어려움

원기58년 2월 2일 교단의 중요한 일꾼인 각산 신도형 종사가 38세의 나이로 열반했다. 서울로 교리강습을 가기 전 교립 동화병원(현 익산 원의원 부지)에 잠깐 입원하여 영양제를 맞던 중 일어난 의료사고인 셈이었다. 당시 총부에 다녀온 노 교무는 신 종사의 호소에 간호조무사가 놓았던 주사바늘을 황급히 제거했지만 신 종사는 전주예수병원을 거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지고 끝내 패혈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열반에 들고 말았다. 당시 간호조무사의 사사로운 의료행위가 교단의 큰 사고로 변했고, 노 교무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정식 간호사로서 책임을 지고 이리경찰서 나무의자에 앉아 하루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 일은 공인으로서의 노 교무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책임과 오해의 문제에 앞서 의료행위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며 사소한 관리일지라도 빈틈없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출가 이후 간호사로서 3년을 근무했던 동화병원에서는 큰 어른의 열반 외에도 끊임없는 재난이 줄을 이었다.

어느날 밤 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서무를 보던 안민순 교무(현 신림교당)와 함께 잠들어 있는 환자들을 놀라지 않게 뒷동산으로 조심스레 대피시키기를 10여회. 모든 환자들이 소개되자 그때서야 자신들의 방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원불교 교무로서 당장 머리빗과 옷이 없었지만 인사사고가 없었음에 위안 삼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한다.

간호사, 그리고 출가

노 교무는 외가인 전북 완주군 삼례읍 수계리에서 자랐다. 교조인 대종사가 점지한 땅 수계농원 인근인지라 원불교가 일찍부터 뿌리를 내린 곳이다.

노 교무는 수계교당 어린이회를 다니며 교당 창립요인인 외조모님(완타원 김윤중)의 영향을 받아 일원상서원문과 반야심경을 자연스럽게 외웠고, 흰 콩과 검은 콩을 굴리는 태조사법을 따라 흉내 내곤 했다.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전주간호전문대(현 전북대)에서 간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간호전문대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할 무렵 정녀가 많은 이 회상에 의료인이 필요할 거라는 주변의 뜻과 본인의 발원이 합쳐져 출가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맨 처음 총부에 와서 탱자나무 울타리 주변을 뒷걸음질로 비질하는 것을 보았어요.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는 청소모습을 보고 앞으로 이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성현의 아들이 되라는 뜻의 ‘성자(聖子)’란 법명은 정산종사께서 직접 지어 주셨다고 한다. 이 이름은 두고두고 노 교무가 불퇴전의 정진심을 다지고, 교단 의료계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좌우명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8년 심공드린 주초기도

노 교무는 힘겨웠던 동화병원 3년의 근무를 마치고 부산동래교당을 시작으로 교화계에서 10년을 봉직했다. 특히 부산 서동교당 개척교화시절에는 6년간 학생과 청년, 어린이로 이어지는 청소년교화의 전성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노 교무는 또다시 교단의 부름을 받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원광대병원이 설립되면서 그에게 중책을 맡으라는 교명이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제2의 간호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근무 당시 30만원이 안되는 첫 월급을 타자 가장 먼저 의학용어사전과 간호학 서적, 그리고 흰 가운을 샀어요”

교명을 받아 원기70년(1985) 원광대병원이 완공되자 간호부장직을 맡아 18년의 봉직을 해왔고 현재는 전북간호협회장도 맡고 있다.

원광대병원 개원이후 노 교무가 꾸준히 이어온 것이 있다. 매주 월요일마다 환자의 쾌유와 직원들의 상생상화를 위해 올려온 주초기도가 그것이다. 처음엔 병원에 근무하는 교무들과 함께 했으나 이제 직원들 일부도 함께 한다. 원불교 교무라는 성직자인 동시에 간호사로서의 심공이다. 병원을 찾는 이들을 맞는 그의 심신은 이렇게 다져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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