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 물은 견성도인

숭산 종사 약력
1915년 8월 15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출생.
1937년 2월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1942년 2월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 졸업.
4월 원불교 중앙총부 교무부장.
1946년 원불교 유일학림 학감.
1950년 원불교 중앙총부 교정원장.
원광대학 초대 학장.
1953년 원불교 수위단원.
1964년 원불교 개교 반백년기념사업회 회장.
1972년 원광대학교 총장.
1986년 12월 3일 열반.


1986년 12월 3일 숭산 박광전(崇山 朴光田) 종사의 열반 소식을 접한 민준식 전 전남대 총장(광주교당)은 진솔한 애도의 글을 표한다.

‘무상함을 가눌 길이 없다. 우리 교육계와 종교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 그 분은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맏아들이시다.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를 나와 줄곧 원불교 교역자로서 일생을 고스란히 바쳤다. 나면서부터 떠날 때까지 오직 외길을 걸으신 분이다. 한국종교와 세계종교에 끼친 그 불후의 공적은 실로 우뚝 솟은 뫼(崇山)이었다

훤칠한 키에 원불교의 상징처럼 뚜렷하고 항상 미소를 담고 있는 그 어른은 참으로 너그러운 분이었다. 필자의 깊은 만남도 그 분의 너그러움 그러나 소신에 찬 원사상(圓??)에 기인한 기연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분은 말이 없고 걱정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대학가에선 흔히들 그 분을 ‘생불’(生佛)이란 애칭으로 통했다. 나는 그 애칭이 그 분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이 시간에 다시 한번 느껴본다. 그 분은 진리를 깨닫고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마음에 아무 것도 걸릴 것 없이 살으신 분이다.

향년 72세, 천수를 다 하셨다. 하지만 너무나 아쉽고 허퉁한 일이다. 학계에선 박길진 총장님! 종교계에선 박광전 법사님! 우뚝 솟은 뫼(崇山)로 길이 가슴에 살으리라'


이 몸이 성도하여

숭산은 1915년 8월 15일 전남 영광에서 부 박중빈 모 양하운(梁?雲)의 4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대종사는 어릴 때부터 자연현상과 사물에 대해 스스로 탐구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일곱살 때 서당에서 서대원(徐?圓)과 함께 천자문을 배우고 백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 3학년 때 전북 익산으로 이사하여 일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창신동 경성출장소(서울교당 전신)에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정진하여 수석을 한다. 4학년이 되면서 철학서적을 탐독하고 논어·맹자·중용을 공부한다. 방학이면 익산총부에 내려와서 대중들과 함께 설법을 듣고 경전·강연·성리시간에 참석했다.

1935년 2월 큰 뜻을 간직한 20세의 숭산은 <회보> 14호에 ‘나의 원’을 발표한다. 이는 성가 제10부 낙도(樂道) 112장 ‘이 몸이 성도하여’로 널리 불려지고 있다. 이는 그가 얼마만큼 내면적으로 성숙한 한 비범한 청년이었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한 깨달음을 얻은 득도의 소식으로 크게 주목된다. 후에 숭산은 성리에 눈뜨게 지도하신 대종사의 비범하고 탁월한 가정교육을 회고한다.

1937년 3월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총부에서 대학 진학 문제로 논란이 생긴다. “이 교법을 더욱 주체적으로 폭넓게 펼쳐가기 위하여 철학과 종교를 연구하겠다”는 숭산의 소신에 대종사는 “네가 길을 옳게 잡았다”고 허락했다. 숭산은 4월 일본 동경 동양대학에 유학,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사서 공부하게 된다. 한 학생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면서 아침 저녁 두끼로 때우며 5년 동안 양복 2벌 구두 두 켤레로 마친다. 생활불교로 토착화한 일본의 불교와 기독교를 살펴보며 승려들을 만나 선문답(禪問答)를 한다.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을 만나 신(神)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한편 단전주(丹田住) 수련에 적공한다.


대종사를 기쁘게 한 큰 물음

숭산은 1942년 3월 하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불교전수학원 인가 받는 일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음 해 1월 원래 정남(貞男)을 하려 했으나 어머님을 모시는 문제로 부산의 임영전(林靈田)을 신부로 맞이한다. 4월 총부 교무부장으로 새 회상 교역자의 첫발을 내딛는다.

어느 날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여쭙는 숭산에게 대종사는 “네가 큰 진리를 물었도다.”고 기뻐하시며 일원상 신앙·일원상 수행·도형(圖形)으로 그려진 일원상(대종경 교의품 3∼6장)에 관한 유명한 법문을 내려주신다.

병환 중의 대종사는 삭발한 숭산을 보며 미소를 지으신다. 춘향전·심청전에 곧잘 울던 숭산은 대종사의 열반 앞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 후 아우 광령과 주산(主山)의 열반을 겪으면서 눈물을 거두게 된다. 인간의 생과 사는 인과 윤회의 흐름 속에 오고 가는 변화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생불’님 대학총장

정산종사 중심의 교단은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의 해방을 맞이하여 9월부터 서울·부산·전주·이리에서 해외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펼친다. 다음 해 5월 총부 구내에 대종사께서 뜻한 바 있는 교육기관의 모체로 유일학림(唯一學林)이 발족한다. 숭산은 유일학림 학감에서 원광초급대학→원광대학장으로 일취월장의 신장세로 양적 질적 비약을 일으켜 국제적 수준의 종합대학으로 웅비시킨다.

“원광대의 기풍과 윤리는 그 어른의 고일(高逸)한 인격과 깊은 수행의 발자욱으로 충일되어 있다. 캠퍼스에 들어서면 포근하고 고요하고 차분하다. 그 분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용조용하였다. 어떠한 일이나 평상심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분의 말씀은 우뢰같은 웅변으로 그 누가 그 분 앞에서 감화되지 않을 수 있으랴. 또한 깊은 수행으로 세속을 초탈하였으니 진세에 잠긴 중생에게 새로운 정신을 깨우치게 하는데 실로 귀감이시었다.”(민준식 전 전남대 총장)


해외교화 첫 발걸음

숭산은 1957년 원광대학교 부설 ‘해외포교연구소’ 소장이 되어 전팔근(全八根)교수와 함께 영문판 계간지 ‘Won Buddhism’을 발간하며 해외교화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1958년 제5차 세계불교자대회(태국) 한국대표, 1975년 중화민국 종교협의회 원불교 대표, 1976년 한일종교협의회(일본 대판) 한국대표, 1977년 한일불교교류회 고문, 1979년 제12회 세계불교도우회(일본 동경), 만해 한용운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1981년 동아시아종교자상임이사회 원불교 대표, 세계불교도우회 원불교지부장, 일본 경도 불교대학 명예문학박사로 활약한다.


명쾌한 명 강의 명 설법

대학시절 1만권의 책이 내 손을 거쳐가야 한다고 말씀한 숭산은 1974년 원광대학교 부설 원불교사상연구원 초대 원장으로 《대종경강의》(원광대출판국, 1980)에 이어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원광대출판국, 1985)를 펴낸다. 많은 학생들을 감동시킨 명 강의 명 설법은 평이 간명하고 명쾌하기로 유명하였다.

“우주의 진리를 일원으로 표현한 이유는 생사 거래가 없고, 증애(憎愛)가 공하고, 무시무종(無?無終)하고, 원만 무애하고, 근본이 같기 때문이다. 우주에 한 진리가 있으니 우주 만물을 일관해 있고 만물은 그 분신이다. 그러기에 우주일가(宇宙一家)라 한다. 일원상의 진리는 현재 인간이 다 가지고 있다. 일원의 진리를 믿고 나가는 것이 참된 종교이다. 내 마음이 진실로 원만하여 신·부처·지옥·극락도 두려울 것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참으로 사는 힘을 체득한 사람이다. 부처를 믿어갈 때 부처와 일체가 된다. 부처와 같이 자고, 밥 먹고, 이야기하니 이것이 진실한 신앙이다. 일원의 진리는 꼭 그런 것이라 믿으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부처의 심경과 같이 되고 만다. 신앙이 깊은 사람은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1966년 12월 스승의 학덕과 경륜을 추모하는 후학들의 정성으로 《숭산논집(崇山論集)》이 발간·봉정되었다. 그동안 숭산의 유품이 숭산기념관 한 협소한 곳에 유야무야로 보존되고 있었다. 이제는 선뜻 눈에 띄는 쾌적하고 충분한 공간에 제대로 상설 전시함으로써 많은 뜻 있는 사람들이 청년 숭산의 정각(正覺)의 종소리, ‘생불’스승의 숭고한 인격을 엿볼 수 있는 가칭 ‘숭산실’의 개관을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돌아보면 대산종법사의 추모 말씀에 새삼 숙연히 옷깃을 여민다.

“숭산 종사의 일대 성적(聖蹟)은 대종사님께서 <정전(正典)>에 밝혀주신 시방일가 사생일신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위공망사(爲公忘私)의 거룩한 삶이었소. 아! 장하고 거룩하다. 숭산이라 우러러 받드는 높고 높은 뫼이고 광전(光田)이라 밝고 빛나는 중생의 복전이라. 하늘 같이 높고 땅같이 넓게 길이 빛날 역사의 장을 열었도다.”

숭산의 유족으로는 임영전 정토와 성종, 시현, 병건 3남매가 있다.

이 몸이 성도하여

박 광 전

이 몸이 성도하여 우뢰 같이 소리질러

물욕에 잠긴 여러 동포 새로운 정신 깨우치리라.

이 몸이 성도하여 사바세계 법종되어

질서 없는 우리 동포 차서의 법로 열어주리라.

(성가 112장)



김학인 교무
원불교 역사박물관장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