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교도로서의 첫 걸음 상계교당

나에게도 생활 속에서 원불교와 멀어진 시기가 있었다. 원기70년 7월부터 원기75년 6월까지의 프랑스 유학 기간이다. 원기76년에 파리교당이 생겼으니 그 때까지는 서로 연이 닿지 않았나 보다.

원기75년 7월 초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튼 보금자리가 상계동 주택단지. 겨우 자리를 잡은지 2주일 정도 된 후에 치산님을 따라 찾아간 교당이 상계교당이었다. 상계교당은 원기75년 초에 봉불식을 가졌으니 초창교당이었으나, 상계 지구가 대규모 신흥 주택단지이었으므로 교도들 수는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송원전 교무님 혼자서 사회 보시랴, 피아노 치시랴, 설교 하시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몹시 안타까웠다. 그래서 내가 사회 맡기를 교무님께 제의 드렸더니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이 때부터 무려 7년 동안 ‘죽비권’을 독점하였으니 장기집권은 정치권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오랫 동안 사회를 본 덕에 나는 두 가지의 소중한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법회 시간에 앞서서 교당에 나가는 습관, 그리고 법회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 심고문을 준비하는 습관이 그것들이다.

도타원 김도경 2대 교무님은 부임하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할 만도 하신데 나에게 죽비를 그대로 맡겨 주시고 무엇이든지 의논해 주셨다. 당시 장효병 회장님은 웃어른으로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시는 편이었다. 나는 부회장을 맡고 있었지만 교화협의회에서도 사회를 보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상계교당 남자단 식구들과는 남달리 법정이 두터워졌다. 그것은 매년 한 두 차례 남자단 식구들이 따로 훈련을 나곤 하였기 때문이다. 바쁜 주말 시간을 내어 삼동원, 수계농원, 만덕산 등을 찾아다니며 1박 2일의 훈련을 나게 되면서 일원의 진리를 향한 신앙심과 수행심은 깊어만 갔고, 남자단 식구들의 법정은 한없이 두터워져 갔다.

상계교당과의 인연이 이렇게 두터워졌기에 원기80년 내가 현재의 고양시 화정지구로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나는 이미 화정교당이 열린다는 말을 들었기에 “가까운 교당으로 가는 것이 원칙이다”라는 매정한(?) 마음을 먹고 있었던 참이다. 김도경 교무님의 눈에 서운함이 맺히기 시작하였고 교도님들도 모두 서운한 심경이 되어 갔다. 그런데 독한 마음을 가지면 벌을 받는 것인지? 그 당시까지 매일 아침 수락산 정상까지 등산을 다니던 필자가 수락산 정상 바위에서 낙상을 하고 만 것이다. 3주일 동안 집에 드러누워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머리맡에 병문안을 오신 상계교당 교도님들은 한결같이 “부회장님이 가시면 교무님 병나요.”하고 반복해 대니 내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식구들은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화정교당을 두고서 상계교당으로 일요일마다 1시간 반이 걸려 전철을 타고 가게 되었다. 그 질긴 죽비권의 독점도 원기82년 9월 내가 OECD 근무를 위해 프랑스로 떠나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화정교당 교도회장·경제학 박사: 산업연구원 산업정책실장>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