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일 교무
미국의 대통령 링컨은 “한 인간을 시험하려면 권력을 주어 보라”고 했다. 여기에 돈, 명예, 사랑을 부언하면 어떨까 싶지만, 권력을 가지면 이 모든 것이 따라오기 마련이니,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게 인간의 속성을 찌르는 말도 없지 싶다.

월드컵 축제마당에도 나라가 온통 부패 시비에 휘말려 있다. 대통령 아들들로 상징되는 이번 스캔들이지만 어찌 이들 뿐이겠는가.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인이 정치인이며 부패한 집단의 첫 손가락으로 정당을 꼽은 것은 요 근래 일이 아니다.

권력이란 도대체 독재와 부패를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적어도 한국상황을 놓고 보면 그 말이 맞을 것 갖다. 역대 대통령 누구하나 이 굴레에서 자유로운 이가 없는 것을 보면 틀림이 없는 듯 하다. 왜 우리는 권력에만 다가서면 제왕(帝?)이 되고 싶어하는 유혹에 빠지는 것일까? 왜 권력이라는 도구 사용에 이처럼 미숙한 것일까?

권력은 나누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엉켜서 독점 지배된다. 권력의 비대화란 하나의 속성처럼 보인다. 또 권력의 칼날은 예리하다. 칼이란 휘두르면 상처받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맞서지 못한다. 언제 자신을 향할지도 모를 두려움 때문이다. 반대로 권력을 가진 자는 때때로 오만과 방자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런 이유로 권력이란 일정의 통제아래 있어야 한다.

우린 오래 전부터 사내는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알아왔다. 그런 문화 탓인지 우리는 때때로 권력은 사유물처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효율적인 통치와 업적을 위해 거치장스러운 장애물은 과감하게 베어버리는 칼날쯤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라고 해서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오히려 권력에 진리와 신(神)을 빙의(憑依)함으로서 절대권력화 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가톨릭이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가 바로 인류 문명의 암흑기였다는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 자체 내부에도 권력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권력이란 항상 공의(公議)에 기초하고 공의의 감시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대중의 이복(利福)에 이바지하는 것으로서 신성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가진 자가 몸을 낮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존경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권력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속성에 매몰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문제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늘 수신(修身)에 힘써야 한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절대 권력은 늘 불행을 자초하는 법이다. 권력의 불행은 모두의 불행이란 점에서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교무·문화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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