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와의 만남, 봉사의 기쁨과 은혜

제가 법신불 사은님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이 벌써 7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아려오지만 지금은 사은님과의 인연을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제게는 26년을 키워온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평소 매우 근면성실 하였고, 성품이 바른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대학졸업을 불과 3주 앞두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 세상과 이별을 하였기에 그 슬픔은 이루말할 수 없었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원불교와의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원불교를 만난 후 봉사활동을 통해 아픈 마음을 잊을 수 있었고, 또한 제 남편이 불우한 학생들을 저도 모르게 수년간 돌보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저는 먼저 떠난 자식을 위해서라도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둔산교당 봉공회는 원기83년 4월에 조직되었고, 제가 봉공회장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가장 큰 어려움은 기금마련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50여명의 교도님들과 함께 대전교구 바자회에서 계란이며, 명태찜, 미역튀김, 북어, 한과, 과자들을 팔면서 기금을 마련했으며, 쑥을 캐다가 쑥국수를 만들어서 팔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둔산교당 교도님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대전교구 여러 교당 중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교구 봉공회에서는 지난 4월부터 독거노인들을 위해 주 1회씩 청소, 빨래 등 음식을 만들어 드리고 있습니다.

평소 자원봉사 하는 일이 꿈이고 바람이었던 저는 4년전부터 ‘한사랑 한마음 요양원’에서 중증 장애인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 기저귀도 갈아주고, 밥도 먹여주고, 신발을 신겨서 바깥 구경도 함께 합니다. 그곳 아이들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원 봉사자들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운동을 함께 하고, 밥을 먹고, 팔 다리를 주물러 주다보면 하루해는 어느 새 저물고 맙니다.

아들의 죽음, 봉사는 내인생

그곳에는 기철이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기철이는 그 당시 18세였지만 지체장애, 정신장애를 앓으면서 정신의 나이는 5세에서 6세정도 였습니다. 그 아이 곁에는 누군가가 항상 같이 있어줘야 했습니다.

기철이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등과 허리에는 욕창이 생겼으며 밥도 누군가가 떠 먹여줘야 겨우 받아 먹을 수 있는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제가 가면 저를 기다렸다는 듯이 항상 저에게 노래를 불러줬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직도 그 노랫소리는 귓가에 맴돕니다.

하지만 미소 짓고 불러주는 그 노래 소리도 미소도 이젠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그 아이는 하늘나라로 가서 고통 없는 세상에서 새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중증 장애아를 돌보며, 사은님의 은혜를 느낍니다

아직도 기철이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저는 시각장애, 언어장애, 그리고 뇌성마비 아이들을 주로 돌보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정상적으로 태어났으면 버림받지 않고 행복하게 잘 자랄 수 있을텐데 하는 마음입니다.

사은님께서 제게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을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저는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물질로 짓는 복은 물질로 받고 육신으로 짓는 복은 건강으로 받는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흔히들 봉사라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위하여 자신의 시간이나 물질을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봉사는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진실된 마음으로 봉사에 참여하고 그 기쁨을 맛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봉사란 것은 본인 자신을 위한 것임을 단번에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봉사란 진정 내가 속해 있는 사회, 나의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응당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봉공활동을 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함께 안타까워하고 격려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또한 아들 태준이의 천도를 기원하면서 더욱 정진하고 보은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양 법 진 교도/둔산교당 봉공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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