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타원 오희원 원로교무

원기38년 혜타원 오희원 원로교무는 예비교무 시절 정산종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받들었다.

정산종사는 “너 심고 잘 모시냐? 무엇이라고 모시냐”하셨다. 오 원로교무는 “세계평화. 국운융창, 교단발전 그리고 가족들과 저에 관한 기원을 순서대로 올립니다”라고 대답했다. 정산종사는 “심고 잘 모셔라. 사람의 기운이 미미한 것 같지만 미(微)한 기운이 하늘을 뚫는 법이다. 정성스럽게 올리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정산종사의 처소는 언제나 개방되어 있었고, 오 원로교무가 마음이 번거롭고 답답할 때 찾아가면 의자에 앉아 계시다가 자비성안에 환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시며 “왔냐? 공부 잘하냐?” 하신 간단한 말씀으로 오 원로교무의 온갖 근심과 사념을 녹이셨다.

“몇 말씀 올리고 가만히 있다가 나올때는 나의 업장이 다 녹아버린 듯 해서 상쾌한 기분에 날아갈 듯 힘이 솟아났다”며 “정산종사는 마음과 기운으로 상담하시는 명 상담자였으며, 무언중 내려주신 자비훈증은 평생의 저력이 됐다”고 술회했다.

오 원로교무에게 있어 정산종사와의 만남은 일생을 바꾸는 소중한 계기였다. 원기2년 어머니의 연원으로 입교한후 이화여대에서 약사의 꿈을 키워오던중 6.25 전쟁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 하고 익산의 북일초등학교에서 2년간 교편생활을 한적이 있었다.

이때 오 원로교무는 정산종사를 친견할 수 있었고, 총부 법회나 예회에서 내려주시는 법문을 자주 받들었다.

피난길에서 동족의 비극과 참화를 목격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실감, 생과 사에 대한 회의를 느꼈지만 정산종사와의 만남과 법설은 새로운 희망을 열어주었고, 결국 출가의 길로 인도했던 것이다.

“나는 예회나 야회때 제일 말석에 앉아 법문을 받들었는데 그 내용이 정연하고 표현이 부드러워 법문을 기록하면 그대로 문장이 되어 버렸다. 법문을 강조하실때는 법좌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올리면서 온힘을 다 쏟으셨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고 이야기 했다.

오 원로교무는 법문을 받들때마다 그 현묘하고 심오한 진리 말씀에 황홀해지면서 딴 세계로 끌려 가는듯한 신비한 감동과 마음속에 새로운 세계가 자리잡게 됐다.

‘무엇이 참 나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값진 인생인가?',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출가 서원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던 것.

오 원로교무는 “이렇게 서원을 세운 후 일생동안 세욕에 요란해지거나 경계에 유혹되는 일 없이 수도의 외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가슴깊이 새기고 있는 그 때의 말씀은 I정산종사법어 J무본편 31장의 ‘인생의 참다운 보물 두가지’에 대한 법문과 ‘우주의 무형한 기운’, ‘허공의 주인이 되라’, ‘상없는 복, 음덕을 쌓으라’, 여유있는 행동’, ‘진급의 도’, ‘처세의 비결’등이다.

“내가 뵈온 정산종사는 중생의 무명 업장을 법력의 기운으로 녹여주시는 자비성자였고, 다 보시고 다 알으시면서도 흔적이 없으신 무상도인이셨다.”고 술회했다.

교정원 교무부 과장·동산선원·목포교당 교무·공익부장·이리교구장·동산선원장·원불교대학원장·중앙중도훈련원장등을 역임하며 종명을 세우고 공(公)을 이루는 것을 표준으로 살아온 혜타원 오희원 원로교무.

일생을 ‘매사종관(每事從寬) 자비훈풍(慈?薰風) 상생상화(相生相和) 무상무적(無相無跡)’으로 정진적공해 처하는 곳마다 맑고, 밝고, 훈훈함이 감돌게 한 수도인의 표상이었으며, 후진들의 사표가 되었다.

현재는 영산원로수도원에서 다시 없는 심락을 누리며 수양에 정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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