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적 도덕훈련 선보인 초선지
진안·마령일대 인연 규합한 총부건설 주비지
대종사·정산종사·대산종사 첫 대면지

▲ 초선지 기도실 ‘원불당’ 가는 입구에 세워진 ‘적공실’. 남녀 각 10명 규모로 숙박이 가능한 수행도량이다.
기도실 원불당이 신축된 만덕산 성지는 소태산 대종사가 교단 최초로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선보인 초선지이다. 또한 영광·성주·전주·진안·서울·남원의 인연있는 제자들을 규합하기 시작한 중앙총부 건설의 주비지(籌備地)다.

회상창립 인연결속지

초선지는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상달마을 골짜기 만덕산 7부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선을 났던 ‘만덕산 산제당’ 또는 ‘만덕암’이라 불리는 3칸 기와집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신축된 원불당은 이 초선터 입구에 지어졌다.

원기7년 변산 봉래정사에서 교법을 초안하며 회상 창립을 준비하던 대종사는 정산종사에게 “어디든 발길 닿는 대로 가보라. 그러나 전주는 들르지 말라”고 이른다. 대종사의 하명을 받은 정산종사는 전주방면임을 짐작하고 길을 가던 중 진안 만덕산의 미륵사 주지를 만나게 되었고 이로써 교단과 만덕산의 인연이 시작된다.

최도화와의 만남

주지의 배려로 미륵사에서 겨울을 나던 정산종사는 화주 최도화를 만나게 된다. 최도화는 첫눈에 정산종사를 생불로 믿게 되고 정산종사가 미륵사를 떠나자 부안 봉래정사까지 찾아가 대종사를 배알하고 제자가 된다. 최도화는 이후 전주·진안·관촌·마령일대 교화로 초창기 교단발전에 크게 공헌한다. 또한 박사시화 형제, 성성원, 이동진화, 김삼매화, 이공주 등 서울인연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원기7년 12월 대종사는 최도화의 주선으로 만덕산에서 3개월을 머무른다. 이때 머문 곳이 바로 ‘만덕암’이다. 대종사는 이곳에서 최도화의 인도로 전삼삼·전음광 모자와 노덕송옥(대산종사 조모)을 만나며 회상창립의 중요인재를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대종사가 만덕산을 두 번째 찾은 것은 원기9년 익산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연 며칠 뒤였다. 만덕암에 있는 대종사에게 최도화의 인도로 노덕송옥이 손자 김대거를 데리고 귀의하였고 서울에서 제자가 된 이동진화가 김삼매화, 박사시화와 함께 대종사를 찾아왔다.

3대 주법 대산종사 인연지

대종사는 이 두 번째 만덕산행에서 김광선의 주관으로 12명의 제자와 1개월 가량 선을 났다. 이를 ‘초선(初禪)’이라 한다. 대종사는 이듬해인 원기10년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을 발표하고 이에 의거해 중앙총부에서 첫 정기훈련을 시행한다. 초선은 장차 정기훈련을 시행하기 위한 구상과 준비 속에 이루어진 만큼 교단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만덕암은 소태산대종사-정산종사-대산종사로 이어지는 새 회상 3대 주법이 최초로 한자리에서 만난 역사적인 곳이다. 초선에 11세로 참여한 김대거는 뒷날 출가하여 정산종사의 뒤를 이어 종법사가 되었고 좌포 김씨 문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 회상에 귀의하게 되었다.

새로운 신앙·수행도량

만덕산은 원기15년 대종사의 권고를 받은 이공주의 희사로 임야를 매입하고 원기17년 산전 개간을 하며 감나무 등을 심는 등 개발을 시작했다. 그 후 중길리 상달에 중길리 출장소의 문을 열었으나 마을과 함께 교당이 불로 전소되어 마을 교화의 꿈이 깨어지게 되었다.

원기52년 법당겸 숙소를 짓고 원기58년 양제승 원로교무가 부임하면서부터 만덕산 성지가 조금씩 수호되었고 동시에 만덕산농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만덕산 훈련원과 만덕산농원은 일과 공부를 통한 사상선과 주 생산품인 표고버섯을 재배하여오다 최근 영농법인을 설립했다. 만덕산 푸른생명효소와 효소선훈련원으로 웰빙시대 새로운 건강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는 것.

훈련도량과 산업도량의 면모를 갖추어온 만덕산은 이제 기도실과 적공실을 갖추고 새로운 신앙·수행도량으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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