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들녘에서 선 을 거둔다

대종사 조실에 계시더니, 때마침 시찰단 일행이 와서 인사하고 여쭙기를 “귀교의 부처님은 어디에 봉안하였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 부처님은 방금 밖에 나가 있으니 보시려거든 잠깐 기다리라.” 일행이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여 의아하게 여기더니, 조금 후 점심 때가 되매 산업부원 일동이 농구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거늘 대종사 그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다 우리 집 부처니라.”(대종경 성리품29)

우리집 부처는 밖에…

요즈음 황금 알갱이가 빼곡한 황등 들판에서 분주히 보석을 캐는 이가 있다. 중앙총부 농원의 박관덕 교무(62)가 그다. 중앙총부와 원광대 뒷편의 넓은 경작지가 그의 일터인 셈이다. 작황이 좋은지 콤바인을 몰고 가는 그의 얼굴엔 기쁨이 넘쳐난다.

중앙총부의 논은 모두 33필지, 그중 16필지를 박 교무가 직접 경작한다. 1필지에서 쌀이 25∼28가마가 나오니 어림잡아 80kg들이 1천 가마의 쌀이 나오는데 그중 절반이 매년 그의 손에서 경작되는 것이다. 이미 찰벼는 9월말부터 베기 시작했고, 이 달 말까지는 일반벼 수확을 계속한다.

검은 교무 얼굴

수확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연초부터 바쁜 손놀림이 뒤따라야 한다. 3월말부터 모판에 흙을 담기 시작해서 4월 중순에 종자를 파종하면 1달간 모가 자란다. 1필지에 모판이 대략 150판이 들어가니 2천판이 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때부터는 연습이 없고, 한가지의 일만 하는 단순작업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농사 짓는 것을 우리네 삶에 비유했을까?

모관리를 겸하며 논에 쟁기질을 시작해 물을 채운 뒤 5월에 논을 고르는 로타리를 시작한다. 봄볕 때문에 딸 대신 며느리를 내보낸다는데 그는 상관없이 온통 햇볕을 친구삼아야 한다. 그래서 “교무가 얼굴이 이렇게 검어서…”라며 겸연쩍어 한다.

5월 중순경부터 모심기를 시작하면 물관리에 들어간다. 이 때부터 그의 관심은 온통 논에 가 있어야 한다. 자식들 외지에 유학 보낸 심경이란다. 혼자 짓는 농사는 아니지만 유기농이 아니니 약도 해야하고, 거름도 하고, 풀매기 등도 모두 그의 판단에 의해 진행이 된다. 모든 농사일이 다 자식농사 같겠지만 예로부터 쌀농사는 그 근간이 되는 농사였다. 그래서 쌀개방이 논의되는 요즈음 그의 마음이 편할 길 없다.

영세교당에 햅쌀이

탈곡과 건조가 끝나면 햅쌀이 나오는데 이 쌀은 중앙총부 공동체들의 식사이기도 하지만 프랑스나 독일 등 국외교당에도 보내고, 국내 개척교당에도 70∼80개 정도를 보낸다.

지난해에도 박 교무는 재정산업부의 지시를 받아 파리와 프랑크푸르트교당 등 해외 2곳과 교화훈련부에서 선정한 전국 어려운 교당 70여곳에 40Kg들이 쌀 1가마씩을 일제히 배송했다. 수확의 훈훈함을 나누는 이 영세교당 지원은 원기85년부터 4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박 교무는 논에서 직접 흙과 함께 하며 그 농사일을 진두지휘 한다. 중앙수도원과 원불교대학원대학교의 논도 그가 관리한다. 20여종의 농기계관리도 그의 몫이다. 그러다 보니 인근 소작농이나 농군들도 그에게 농사일의 조언을 구하러 오곤 한다.

시계추와 같은 수행

전남 완도 불목리 출신인 박관덕 교무는 부안 백산교당에서 1년 근무한게 교화 경험의 전부이다. 그외에는 수계농원 간사시절부터 온통 교단의 논농사에 주력해 왔다. 수계농원 3년, 영산에서 4년, 삼정원 1년, 철산농원 1년반, 그리고 중앙총부에서 14년째 온통 논농사 일색이다.

검게 그을린 박 교무의 얼굴은 농사일의 고됨을 대변해 주건만 너털하고 투박한 웃음은 그를 더욱 교무이게 만든다.

그가 더욱 존경스러워 보이는 건 매일 새벽 언제나 남먼저 자리잡고 앉은 대각전에서의 가부좌 튼 모습이다. 새벽 좌선이 수행인의 일상이건만 그가 육체적인 노동을 주업무로 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고된 작업을 하건 안하건 그에게 법당의 새벽은 하루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는 아침좌선과 목요야회, 일요예회에 빠짐이 없다. 농사일이 해마다 반복되듯 그는 시계추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