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정성으로 일궈낸 훈련勝地

   
 
  ▲ 황무지를 옥토로 일궈낸 배내청소년훈련원 전경.  
 
   
 
  ▲ 배내청소년훈련원 임직원들이 향타원 종사를 모시고.  
 
   
 
  ▲ 5월16일 봉불식을 앞두고 있는 대각전의 위용.  
 
교단 최초의 청소년훈련 도량

영취산 푸른 숲은 하늘 높이 솟아 있고/진달래 연달래 휘늘어지니 배꽃도 방실방실/맑은물은 천년 두고 흐르며/새소리 벌레소리 만고설법 이 아닌가

간월산(肝月山)에 둥근 달이 솟으니 사자봉이 밝았으라/우리 도량 배내 도량 너도나도 정진하니/마음달이 온누리에 밝았으라/육도세계 다 즐기니 하나세계 이 아닌가

위 가사는 향타원 박은국 종사(香陀圓 朴?局 宗師, 77)가 손수 지은 배내청소년훈련원을 기리는 노랫말의 일부이다.

우리 회상 최초의 청소년훈련 도량인 배내훈련원, 향타원 종사와 그를 따르는 법연들의 혈심혈성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일궈낸 개척의 생생한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1박2일(4월 19,20일)의 일정으로 총부를 나섰다. 배내청소년훈련원 개척의 일꾼인 김순익 교무(교정원 문화부)가 법동지로서 안내역을 기꺼이 맡아 주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가로 지르며 배냇골 개척의 산 역사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보니 그리 먼길도 지루한줄 모르고 단숨에 배내훈련원에 당도하였다.

배내청소년훈련원 최초의 건물인 간월당(肝月堂)으로 찾아드니 향타원 종사님이 관세음보살의 자비로 우리를 맞이 하신다. 향타원님의 따스한 미소와 여유로우면서도 다정한 말씀은 어머니의 넉넉한 품마냥 편안한 마음의 안식을 느끼게 한다. 대각전 봉불 행사를 앞두고 마음 쓰시느라 여간 힘이 들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루 한 차례 기도터에 올라 이 나라 청소년과 지도자를 위해 기도 하신다는 향타원 종사. 때마침 기도 시간이라 비가 아직 미처 다 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터로 나서시는 향타원님의 뒤를 따랐다. 간월당을 나와 청소년의 집(한둥근집)을 지나 새로 지은 대각전을 끼고 오르니 배내청소년훈련원서 제일 높은, 좋은 기도터가 나타났다.

청소년들아 하늘같이 맑고 드높아라/땅같이 깊고 넓어라/일월같이 밝고 빛나라/산같이 순수하고 힘차라. 향타원 종사가 평소 청소년들에게 바라는 염원이다.

朴기터에 자리잡은 대각전

기도터를 내려와 대각전을 둘러 보았다. 법신불 일원상을 모신 대각전은 배내청소년훈련원 터의 가장 중심으로 일찍이 “박씨성을 가진 사람을 기린다”는 ‘박기터’에 자리잡아 사찰과 같은 전통 한옥으로 건평 50평의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원남교당 교도인 신타원 김혜성(信陀圓 金慧?)종사가 그 아들(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법명 석원)의 대성(?成)을 기원하는 뜻으로 평소 저축해온 6억원의 정재를 기꺼이 희사해 이루어 낸 대불사다. 대각전 옆에 세운 육모정(?田亭)에 걸어둘 이산 박정훈 교무(서울교구장)가 붓글씨로 쓴 ‘발원문’에 대각전 신축불사의 기연이 소상히 밝혀져 있다.

“이곳 배내와의 기연은 장자 홍석원을 해운대 앞바다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솟아오를 때 주위가 온통 황금빛으로 변하며 부처님상이 바다 속에서 솟아올라 빙그레 웃는 태몽 후 얻음에서 비롯하였다. 아들을 위해 경상도에 대불사를 하여 보은하기로 서원하던 중 이곳 배내를 처음 개척할 때 와서 산세(山勢)와 지세(地勢)에 감탄하며 숙겁의 불연지(佛緣地)임을 깨닫고 대법당을 건립하고 소년 대종사님 관천기의상(觀?起疑相)을 조성하여 많은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심성을 찾아 진리를 얻고 인성을 단련, 도덕을 함양하여 국가의 재목이 되고 인류의 선구자가 되어 전반세계(氈盤世界)를 이루어가는 대훈련 승지(勝地)가 되기를 발원하였다.”

탈속한 명당을 찾아

풍수지리학자로 유명한 최창조 씨는 우연히 배내청소년훈련원을 찾아와 둘러보고 간후 그가 요즈음 한겨레신문을 통해 연재하는 ‘최창조의 땅의 눈물 땅의 희망’에다 우리 배내훈련원을 대서특필 하였다. (한겨레신문 2000년 4월 7일자 12면)

최창조 씨는 ‘낙동정맥의 중심 간월당’이란 제목의 글에서 “여기는 자궁속 물렀거라 삿된 모든 것들아” 또는 “속인(俗人)이 머물곳이 아니로다 영남 일곱 명산을 낀 가지산(伽智山) 아래 배냇골, 아니나 다를까 원불교의 탈속(脫俗)한 도량이” 등으로 명당에 우리 배내청소년훈련원이 자리하고 있음과 이러한 자리를 알아보고 도량을 마련한 향타원 종사의 안목과 깊은 수도생활을 통한 혜안을 격찬하고 있다.

배내청소년훈련원은 영남의 7대 명산이라 하는 취서산, 신불산, 천황산, 가지산, 운문산, 고헌산, 문복산 군락에 속해 있다.영남의 알프스라 불리는 이 산들은 모두 1천m가 넘는 산들로 이 중 가지산이 가장 높다. 가지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남행하면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닿는다. 이곳은 본래 배냇골이라 불리던 곳으로 한자화하여 이천리가 되었다. 산에 돌배나무가 많아 이천리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어쩌면 우리말 그대로 어머니의 품속 같은 지형이라 배냇골이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아늑한 계곡 속이다.

배내청소년훈련원은 젊은 시절부터 청소년교화를 염원해 오던 향타원 박은국 종사가 원기 71년(1986) 부산서부교구장으로 부임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물론 그 이전인 원기 68년에 대신교당 황제홍 교도가 교구 훈련원 부지 명목으로 희사한 부산시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 소재 임야 11,490평이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이 땅은 배내청소년훈련원 몫으로 남아 있다.

향타원 종사는 용수리 땅이 청소년훈련 부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입지조건으로는 계곡이 있고 물의 양이 풍부할 것, 향(向)이 남향일 것, 형국이 잘 짜여져 있을 것, 값이 형편에 적합할 것 등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향타원 종사는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부산 경남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천행으로 배냇골에 당도한 향타원 종사는 이 곳을 청소년훈련원 적지로 낙점하였다.

부산교당 민산 김인수 교도와 랑타원 서향원 교도 부부가 정재를 희사, 부지 1만여평을 매입하였다. 김인수·서향원 교도 부부는 배내청소년훈련원 건설을 위해 10여년 세월을 한결같은 정성으로 차량을 여러대 사주고 해마다 나무를 사주는 등 끊임없이 돕고 있는 일등 유공인이다.

삼동청소년회 법인 인가

향타원 종사는 부산서부교구장으로 재직하면서 청소년훈련원 건립을 교구 당면과제로 확정하고 교무와 교도, 원덕회 봉공회 등 교도단체들을 독려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향타원 종사는 우리 교화의 돌파구와 미래의 청사진이 청소년교화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온 평소 소신을 펴기 위해 두팔을 걷어붙였다. 물론 우리 교단 훈련원 명칭에 청소년훈련원을 내세운 것도 배내훈련원이 최초가 되었다.

원기 74년(1989) 배내청소년훈련원 재산으로 사단법인 삼동청소년회의 법인인가를 받아냈다. 이는 청소년단체 사단법인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제1호가 되었다.

배내청소년훈련원 부지를 처음 우리가 인수할 무렵에는 이 곳이 대부분 전답(田沓)으로서 옛날부터 화전민들이 들어와 생업을 유지해오던 곳으로 50여 지번으로 나눠져 있고 주인도 여럿이어서 땅을 구입하는데 2∼3년이 걸렸다. 현재까지 우리 소유로 확보한 땅은 10,564평, 국유지를 빌려쓰는 곳은 5,575평으로 대지가 1,324평이고 대부분이 밭이다.

원기 73년에 현재 소법당과 관리사무소, 교무들 숙소로 쓰고 있는 간월당을 지었고, 원기 75년에 청소년의 집(한둥근집)을 짓고, 이어 식당, 숙소인 백심당, 조실인 사은정사 등을 차례로 세우고 이번에 대각전을 신축하게 되었다. 사은정사는 종법사 행가시 사용하는 조실로서 도타원 홍도전 대호법의 희사금으로 25평 전통한옥으로 지어졌다.

배내청소년훈련원 건설은 큰 공덕주 몇분의 희사에 힘입은 바 크지만, 천오백일기도, 삼천일기도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도에 동참하고 있는 부산교구 내 교도님들, 특히 부산교당 신미생(辛未生, 70), 초량교당, 동래·해운대·대연교당 등 3개팀이 매월 음력 보름을 전후하여 1박을 하며 기도하는 원력과 전국 각지의 유연 재가 출가 교도들의 합심합력의 결정체라 하겠다.

또한 국유지 임대 사용 등 국가와 관공청을 상대로한 행정절차에 어려움이 봉착할 때에는 당시 김영준 감사원장(나도국 교무 외숙) 등 교무 친지나 김호영 화곡교당 교도회장을 비롯한 교도 공무원들의 합력으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조치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곤 했다.

또한 오늘의 배내훈련원이 있기 까지에는 향타원 종사를 도와 보필지사로 자신을 아끼지 않은 박혜철·서도현·고혜관·최현천·김순익 교무를 비롯 역대 임직원들의 피땀이 숨어 있다.

역풍 불려 산불 끄고

김순익 교무는 배내청소년훈련원 건설의 지난 날을 이렇게 회고한다.

“화전민들이 일궈 먹다 버려진 곳으로 그야말로 쑥대밭이었어요. 교구 청년들이 자원봉사를 나와 낫으로 베는데 도저히 일이 진척이 안되자 불을 지르기로 했나봐요. 봄바람이 부는 날 여기저기 불을 붙이고 다니다가 그만 산불이 크게 나고 말았어요. 급히 연락을 받고 다시 어른(향타원님)께 보고를 드렸는데, 교구장님(향타원님)께서 부산교당 식구들을 모두 법당에 모아놓고 목탁을 크게 치며 일원상서원문을 외우도록 하셨답니다. 그 기도 위력인지 산정상을 향해 무섭게 타올라가던 불길이 난데없는 역풍을 만나 정말 거짓말 같이 잠자게 되었어요. 그 일을 겪고 나서 향타원 종사님이 무서운 분이란걸 확실히 알았습니다. 한 성자의 원력이 오늘날 배내훈련원을 있게 한 것으로 압니다.”

배내청소년훈련원은 1천m가 넘는 겹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해발 6백m 고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앞 계곡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도량이다.

기자가 찾은 날은 때마침 내린 비로 계곡물이 더욱 큰 소리로 밤새도록 장광설법을 토해내고 있었다. 익일은 비가 개이고, 산빛은 아직 이른 신록으로 막 새움이 돋기 시작해 연초록으로 수줍게 보였다. 사진 촬영을 위해 야외법당으로 건너가는 개울가에는 버들강아지와 찔레의 여린 새싹이 반긴다. 산에는 진달래 붉게 물들고 도량안에는 벚꽃, 복사꽃이 만발하고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도량에 마련된 전통찻집에서 공양하는 녹차 한잔은 나그네의 피로를 씻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5월16일 대각전 봉불식

이곳 배내청소년훈련원 가족을 기도터로 모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향타원 종사는 부산교구 교령으로 배내훈련원에 상주해 있고, 원장은 교산 이성택 부산교구장이 당연직으로 겸하고 있으나 공무로 바빠 함께 할 수 없었다. 장덕훈 부원장, 김혜실 교무, 김교선 교무, 성정경 관리부장과 현도진 씨, 배정수 청소년지도사, 식당봉사자 강현진 청학교당 교도, 전무출신을 발원하고 근무하는 간사 박근삼·김성원 군, 그리고 김순익 교무가 동참했다. 최형철 교무는 공무관계로 출타해 함께 할 수 없었다.

대각전 앞 돌에 시인 고은 선생이 손수 짓고 쓴 시가 도량의 운치를 더한다.

“우리 모두 한 집안, 어서 오라고 어서 오라고/서둘러 마중가는 물소릴레라, 배냇골 젊은이여 어린이여/우리 모두 한 울안, 한 바람 소리 일레라/여기 오면 금빛 새 모여들어, 우리 모두 한 세상/어제는 빈 가지, 오늘은 가지마다 우르르 꽃일레라”

전남 장성이 고향으로 원기 25년(1940)에 출가 영산학원에서 정산종사의 지도로 전무출신 생활을 시작한 향타원 박은국 종사는 일생을 속깊은 기도적공으로 일관하여 득력하였으며 배내청소년훈련원 건설에 여생의 보람을 가꾸어 가고 있다.

“여기 배냇골이 천불만성 수도승지 훈련승지 정진승지가 되길 늘 기도드리며 삽니다.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을 맞아 배내훈련원에 대각전을 신축하고 소년 대종사상과 만인동참 영기합일대탑을 세우고 봉불식과 제막식을 갖게 되어 작은 보은이나마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법동지들이 많이 모여 큰 불사를 해준 분들을 기쁘게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향타원 종사의 염원처럼 오는 5월16일 봉불식 행사가 크게 성황하기를 기도드리며 우리 교단에 배내청소년훈련원 같은 천혜의 여건을 두루 갖춘 훈련도량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함을 느끼며 총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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