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공현 교도  
 
대종사님의 일대기를 보면 대각을 이루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신 대표적인 일이 방언공사입니다.

지금부터 81년전 방언공사를 통하여 농한기에 자칫 부정적인 생활로 흩어지기 쉬운 당시의 민중들에게 생산적인 삶의 길을 열어주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심어주며, 봉공의 신념은 어떤 어려움도 헤쳐 결과를 가져옴을 실증적으로 보여 체험케 해주셨습니다.

대각 이전의 대종사님의 행적을 보면 이러한 활동을 볼 수 없습니다. 사회참여가 없는 구도의 길이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대각 이후의 대종사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되는데, 오히려 그 활동을 신격화시켜 놓고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밖으로 미래로 사회로 세계로’라는 左山종법사님의 신년휘호는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시민운동의 이념으로 생각됩니다.

밖으로 미래로 사회로 세계로 나아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시민단체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참여의 이념은 대종사님의 행적이나 左山종법사님의 말씀에 이미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될 일은 그 이념을 현실화시키는 노력입니다.

사회참여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교단내에 설립된 봉공회, 청운회, 새삶회, 여성회, 청년회, 대학생연합회 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단 밖의 봉사단체나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도님들은 그 단체가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봉사단체나 시민단체 모두 자원봉사자가 근간을 이룹니다. 자원봉사에 한번이라도 참여해 보는 것이 사회봉사의 시작입니다.

어떤 교도님은 이러한 단체에 회비를 내기만 하면 되지 바쁜 내가 어떻게 자원봉사 활동을 하느냐고 합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 더 값진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처님 앞에 촛불하나를 밝히는 것이 값진 것이고, 부자가 바쁜 시간을 쪼개어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는 것이 값진 것입니다.

돈보다 몸으로 봉사를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즘 인기드라마인 ‘허준’에 나온 대사를 보면 경계를 당하여 고뇌하는 허준에게 스님이 ‘의원은 환자를 고치고, 환자는 의원을 고친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돈을 받지 않고 환자를 고치는 자원봉사를 하던 허준은 환자에게서 무엇보다도 값진 인생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환자는 허준의 마음병을 고쳐준 것입니다.

물론 회비를 내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내서 참여를 해 본다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단내 단체의 임원들은 새로운 교도회원을 맞아 들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운영방법으로는 조직의 현상유지는 될지언정 도약은 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참여하지 않았던 교도들도 참여하여 보람을 느끼고 봉사할 수 있도록 보다 유연한 조직구성을 하며 참신한 시민운동 프로그램이나 자원봉사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야 됩니다.

단체들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임원들의 치심일 것입니다. 주로 사회의 전문가나 높은 직책에 있는 교도들이 임원을 맡고 있는데 이분들은 ‘전문가’라는 말을 잘 새겨 보아야 합니다. 직업을 쓸 때 전문직이라고 쓴다고 해서 아무 때나 전문가는 아닙니다.

치매환자를 위한 봉사를 한다면, 치매에 걸린 시부모를 모셔본 며느리가 전문가입니다. 내가 어떤 분야에서는 가짜 전문가가 아닌가 깊이 고려해 보고 잘난 체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욕심이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됩니다.

교단내의 단체들이 새로운 도약을 하려면 담을 허물고 교단 밖으로 그 활동범위를 넓혀 나가야 되는데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민운동의 대표자를 초빙하여 시민운동의 참여방안에 대한 강연을 부탁하면 주로 개신교와 가톨릭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오게 됩니다. 원불교에서는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 연사는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야 시민운동으로 승화할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러면 듣고있던 교도 중 일부는 “저 사람이 남의 집에 왔으니 그렇게 말하지 자기 교회에서는 안그럴거야, 사회봉사하면서 자기종교 포교하라고 할거야”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단체를 만들었지만 단체의 활동이 원불교 포교로 이어져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기도를 할 때 사적인 욕심이 개입되면 감응이 안되듯이 사회봉사도 포교에 집착하면 사회가 감응을 하지 않습니다. 진실된 사회봉사를 하면 진리가 감응을 합니다.

수많은 자선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있는데 어떤 단체와 손을 잡아야 하고 어떤 활동을 해야하나 혼동이 올 수 있습니다. 이때는 그 활동의 목적과 수단을 모두 살펴보아야 합니다. 목적은 그럴듯한데 수단에 문제가 있는 단체는 경계해야 됩니다. 사회참여에 있어서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1945년 불법연구회에서 해방후 사회참여에 대한 방안을 논의하다가 주산 송도성 종사님은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니 어디까지나 귀환동포, 노무자와 같이 불쌍한 동포를 구제하고 옹호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하여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분야가 급격히 성장하다 보면 초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는데 시민운동도 예외가 아닙니다. 진리를 신앙하는 원불교 교도들이 시민운동에 많은 참여를 한다면 시민운동 자체를 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교 초기에 대종사님의 사회참여 활동이 원불교를 한국의 6대 종교 대열에 들도록 하였듯이 左山종법사님의 법문을 받들어 교도 한사람 한사람이 벽을 허물고 사회봉사에 참여한다면 앞으로 85년 후에는 세계에 대종사님의 법을 활짝 꽃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어떻게 사회화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멀리서 찾을 것이 없습니다. 대각후의 대종사님의 행동을 머리 속에 떠올려 봅시다. 그때의 활동이 그 해답이 아닐까요?


<호적명 병삼, 화정교당, NGO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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