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러시아 동포의 마음에 한국을 심는다

   
 
   
 
2000년, 한-러 수교 10주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8년째 교화활동을 펼치는 유럽교구장 초타원 백상원(初陀圓 白?源) 교무에게는 감회가 남다르다. 불석신명(不?身命)의 신성으로 미국에서 해외개척교화에 뛰어 들더니 사회주의 종주국 러시아가 개방되자, 일원상을 품고 달려갔던 곳, 모스크바.

백 교구장과 한은숙 교무는 입국하기 얼마 전,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의 초대를 받았다. 이재춘 대사는 원광한국학교와 한민족 민속큰잔치를 통해 동포들에게 고국의 문화를 전해준데 감사를 표하며 “한-러 수교 10주년 기념 문화행사를 원불교에서 맡아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1990년 뉴욕교당에서 교화하고 있던 백 교무, 소련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가 개방되면서 한-러 수교를 이룬 직후인 그해 12월 우연찮은 인연으로 모스크바에 가게 됐다.

우연찮은 인연으로 구소련 순방

뉴욕 원광한국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이창주 씨. 이민 1세로서 고르바초프 진영에서 일하던 그는 러시아의 개방 이후, 러시아의 경제상황과 교육, 정치상황을 소개하는 세미나를 주관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세미나에 종교인 20명이 참석하는데 백 교무에게 원불교에서도 참석할 것을 권유했다.

당시 미주교구장 승타원 송영봉 교무는 “여행 삼아서라도 가서 북방교화의 일환으로 소련(당시)의 개방상황을 보는 게 교단적으로도 유익할 듯하다”며 다녀오도록 했다.

소련 정부는 3일간의 세미나를 통해 종교의 문호를 열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백 교무는 러시아에 3일간 머물면서 타슈켄트, 알마타, 레닌그라드 등을 순방하며 고려인들을 만났다. 고려인 단체도 방문,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을 보며 ‘종교를 초월해 한국의 언어와 문화부터 알게해서 민족과 핏줄을 찾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밤 12시를 넘겨 호텔에 도착하고 보니 고려인의 유일한 신문인 고려일보(당시명 레닌기치) 기자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들이 뿌리를 찾는 운동을 벌이는데 러시아 방문단 일행 중 원불교인이 적격이라고 판단했다는 것. 백 교무가 원불교 성직자임을 밝히며 고려인에게 도움을 주고싶다고 했더니 그의 주문 사항은 백 교무의 생각과 일치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백상원 교무는 송영봉 교구장과 상의, 총부로 예산 이철행 교정원장(당시)에게 보고했다. 교정원장은 사회주의 종주국인 러시아에 교화사업에 앞서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시도해봄직 하다고 공감, 대산 종법사께 보고했다. 대산 종법사는 현지답사를 하도록 했고 이철행, 김인철, 박제현, 오희원, 전팔근 교무 등 총부 간부와 교구장 몇 명, 서신교당 한길상 교도회장 등 15명이 1991년 8월24일 구 소련을 답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8월19일 소련정부의 공산당 간부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난일이 있었다. CNN 등 세계 유수의 언론들은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총부에서도 일정을 무기연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이성은 교무가 소련의 마지막 모습을 드러낸 쿠데타의 현장을 봐야한다고 제안, 그 안이 받아들여져 백상원 교무와 한은숙 교무는 한국의 일행보다 1주일 앞서 모스크바로 향했다. 현지에 도착하니 스케줄은 이미 취소돼 있었다. 다행히 1인당 한화 10만원 정도만 추가 부담하면 전세기를 얻을 수 있다는 현지 여행사의 제안을 받고 중앙총부 모스크바 방문단 일행은 80인승 비행기를 전세 내어 승무원 7명, 안내원 1명과 함께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모스크바, 타쉬겐트, 알마타 등을 돌아보며, 집단농장들을 방문하여 고려인들과 만났다.

한국에 귀국한 답사단 일행은 대산 종법사께 보고했고, 계획대로 진행키로 했다. 한길상 회장은 경제적 후원을 하겠다고 나섰다. 원창회에서도 해외교화의 일환으로 기금을 세웠다. 총부에서는 백 교무에게 당분간 뉴욕교당 교무를 겸임하면서 모스크바를 왕래하도록 했다. 백 교무는 1992년까지 5차례 모스크바를 다니면서 원불교의 재단법인 인가도 받았다.

1991년 10월 말, 뉴욕을 방문한 한민족 예술단 43명중 알마타에서 온 철학교수 한구리 박사의 카자흐스탄 한인회 총회시간에 원불교를 소개해 달라는 제안을 해서 당시 수위단 상임중앙이었던 좌산종법사와 태타원 송순봉 교무를 모시고 러시아로 2차답사를 떠났다. 카자흐스탄 한인협회장인 알마타의 한고리 박사가 안내했다. 그가 뉴욕에 왔을 때 환대한 데 대한 보답이었다. 카자흐스탄에는 한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해 처음 정착한 우스도베가 있다. 고려인들에게는 고향과 같은 곳이다. 한인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그들에게 한국어를 찾아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더욱 간절해졌다.

현실은 냉혹했다

1992년 9월, 백상원·한은숙·유형진 교무 3인이 발령을 받고 모스크바에 당도하고 보니, 현실은 냉혹했다.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2주후 한-러 종교협의회가 구성됐고, 창립총회에는 효산 조정근·융산 김법종·박달식 교무와 최준명 서울교구 교의회 의장, 신정훈 회장(원평교당 교도회장)이 참석했다. 빵을 사려면 길게 줄을 서야만 하는데다 언어소통 마저 안되던 그때, 일행은 쌀이며 이불 등을 가져왔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연고자가 없었다. 먼저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났던 여행가이드에게 사람들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한민족과의 첫 만남이 호텔에서 22명 정도가 모인 가운데 이뤄졌다.

행사를 마치고 한인들이 갖고 온 자가용에 한국에서 온 6명을 호텔에 태워 보내고 택시 2대를 불러 1대는 송영봉 교구장, 유형진 교무, 가이드를 태워보냈다. 나머지 1대에 백 교무, 한은숙 교무, 김태원 교무(알마타교당)가 타고 갔다. 그런데 그 택시가 한참 달리더니 멈춰 섰다. 강도가 택시를 덮쳤다. 택시 기사와 짠 것이었다. 수중에 있는 것을 다 뺏겼다. 한 교무는 신발까지 뺏겼다.

모스크바의 9월은 겨울. 밤 11시 30분, 사방은 깜깜하여 어디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일단 큰 길로 나가보기로 했다. 12시가 가까운 시간에 여자들이 개를 데리고 나왔다. 말도 안통하고 집 근처에 있던 극장만 생각나서 극장이 어디냐고 물었다. 경계를 하던 그녀에게 한 교무의 맨발을 보여주며 간신히 설득, 고맙게도 30여분을 걸어서 안내해주었다. 집에 들어오니,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던 송영봉 교구장은 천만다행이라며 교무들을 안심시켰다. 바로 비즈니스를 하는 미국 교포에게 연락,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이사했다.

원광한국학교와 한민족민속큰잔치 통해 한국전통 전해

1993년 1월, 아파트 뒤에 있는 가정전문대 건물을 임대해 학교를 시작하기로 했다. 현지에서 알게 된 여섯 사람을 불러 “1월 9일 개교를 할테니 사람들을 모아 달라”고 했다. 선물로 타올을 준비하고 혹시나 하고 기다렸더니 50명이나 모였다. 더욱 다행인 것은 연령층이 다양했다. 주말을 이용해 시작한 학교교육. 아이들은 유형진 교무가, 어른들은 백 교무와 한 교무가 맡았다. 말이 안통해서 한국말만 했다. 한국 노래, 동요, 가요를 주로 하며 열심히 하다 보니 사람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첫학기 종업식때는 90명. 가을 학기에 학생을 모아 보니 150명이었다. 교사가 모자라 유학생들을 유급 교사로 초빙했다. 학생은 350명까지 늘어 토, 일요일에 몇 그룹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입교를 권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입교한 사람이 250명. 한국에서 가져온 교재의 예화는 교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로 들어가며 교육하니 감응이 된 것. 학교 임대료와 아파트 임대료는 총부를 비롯 한국에 있는 교무님들과 교도님들의 도움이 컸다. 학교도 러시아 교육부에서 운영하는 한민족학교(교장 임넬리)로 이전, 현재 4년이 지나고 있다. 원광한국학교는 토, 일요일을 이용해 12반을 운영한다. 수준별로 차이를 두어 교육하고 있다.

지금은 아파트에서 토요일마다 네차례 선법회를 갖고 있지만, 1999년도에는 아파트 폭탄테러 사건 등이 잦아 아파트에서 집회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교육을 위한 독립공간 확보는 물론 법회를 가질만한 공간이 절실했다. 작년 7월 左山종법사를 비롯 국내와 미국 재가출가 교도들이 협조, 러시아가 모라토리움으로 부동산가격이 3분의 1로 폭락한 시점을 이용, 유치원으로 쓰던 2층 건물(연건평 390평)을 싸게 매입했다. 또한 올해 열리는 정산종사 탄백 기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3년 전부터 저축을 하고 있다. 35명 정도가 참석할 예정이다.

130여개의 다민족이 살던 구 소련에서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던 한민족, 스탈린의 러시아어 공용화와 민족어 말살정책으로 한국어는 불통되고 민족전통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원광한국학교는 음식 요리, 예절 등 생활문화와 전통문화를 체험하도록 하는데도 비중을 둔다.

12개 공화국의 독립기념일인 6월 12일. 매년 이날은 한민족큰잔치가 벌어지는 날로 민족전통을 이해하는 좋은 체험의 장이 되고 있다. 모스크바 시내에서는 이날을 한민족 명절날로 인식하고 있다. 첫해에는 400~450명 모이던 것이 작년에는 2천명이 참석, 대사와 총영사는 물론 기독교 목사도 참석, 현장을 목격하고 다같이 즐겁게 놀았다. 금년 제8회 한민족 민속큰잔치에서는 18개 마당을 열고 상품도 많이 준비할 예정이다. 문화마당도 마련, 전통혼례와 제사의식, 원불교 예법에 의한 장례의식을 선 보였고, 금년에는 과거제도 시연을 연출하려고 하고 있다.

백상원 교구장은 이제 민속큰잔치를 종교화합, 인류화합, 민족화합의 장으로 삼동윤리 실천의 장으로 생각한다.

오늘도 러시아에 사는 동포들의 마음에 조국을 심어 주고자 정성을 다하는 백상원 교구장과 한은숙, 전도연 교무의 간절한 염원이 법신불 사은의 호념 속에 일원(一圓)의 결실로 맺어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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