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인 교무
팽팽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덧없는 세월 속에 자못 부실한 자신의 나이가 부끄럽기만 하다. 왠지 고뇌의 고교시절 산사(山寺)를 헤맨 끝에 미처 몰랐던 이 도문을 찾게된 나는 실로 엄청난 행운아였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곧바로 이 법연 이 기쁨에 철주(鐵柱) 같은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이는 도가에서 크게 경계하여 마지않는 소아(小兒·小我)의 중근병(中根病)이었다는 것을 뼈아프게 뉘우치곤 한다.

자못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으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소리 없이 보다 신중하고 절제된 겸허한 언행으로 다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물질의 노예로 아우성인 지구촌을 진리·도덕의 낙원세계로 인도하는 새 부처님 회상에 동참한 여러 심사심우 도반들과 함께 평범 속에 까닭 있는 마음공부의 실효와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우주의 본원이며 인간의 본성인 일원상의 진리를 직관하는 관공(觀空) 공부에 분발 정진하고 싶다. 늦게나마 마음을 다그쳐 오가는 새벽 좌선 길에 부질없는 일을 떨쳐버린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원상을 상징하는 달을 우러르곤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것을 텅 비운 고요한 침묵으로 서 있을 한겨울의 나목(裸木)을 생각한다.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건너가 저들의 간청에 선뜻 붓을 들어 오늘에 전하는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달마상(達磨像)>은 온통 텁수룩한 수염, 매부리코, 부리부리한 눈망울에 해동 초조(初祖) 보리달마의 청천벽력 같은 큰 깨달음의 섬광이 번뜩인다.

55세부터 8년간에 걸친 혹독한 제주도 유배생활 속에 완성한 불세출의 서예가 김정희(金正喜)의 <추사체(秋史體)>의 매력은 “우선 우직한 힘과 솟구쳐 오르는 생동감, 야성에 가까운 강렬한 개성, 대범한 역동성과 거침없는 자유로움을 들 수 있다”고 한 언론인은 말한다.

돌아보면 인근 마을에 폐인으로 알려진 26세의 청년 대종사의 막심한 중환(重?)을 불과 몇 개월만에 옛 신화 속의 이야기처럼 환골탈태하게 한 깨달음의 위력은 바로 일원상의 불가사의한 자연 치유(治癒)의 효험임을 나는 믿어 의심이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나라에 태어나 대종사와 만남을 평생에 기쁜 일 두 가지로 회고한 정산종사의 자비 경륜과 큰 스승으로서의 모습을 좀처럼 못 잊어 하고 있다.

8·15해방을 맞이하여 전재동포구호사업을 비롯하여 폭주하는 업무에 건강을 잃었던 김대거(金?擧) 서울출장소장은 일체의 문병객을 사절한 위중한 병상에서 “네가 큰 공부를 하는 것 같이 생각하니 마음을 허공(眞空·?有)과 같이 지키느냐”고 자문(自問)하였다. 이러한 관공 공부는 평범한 가운데 까닭이 있는 보림 적공으로 수양력을 함양하는 양공(養空) 공부와 함께 이를 실행하고 실천함으로써 취사력을 쌓아 가는 행공(行空) 공부를 병진함으로써 이루어진 삼위일체의 위대한 결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실히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공부에 큰 힘을 얻게되면 「금강경」에서 설하는 재·색·명·리의 업고에 빠지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사상(四相)을 해탈하고, 맛반야심경」에서 밝힌 뭇 중생이 집착하는 탐·진·치의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직관하면서 일체 고액(苦厄)에 초연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에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하여 무궁무진한 도를 즐기는 낙도생활이 있고, 한판 세상을 새롭게 공부풍토를 진작하는 조용한 혁명이 있음을 확신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같이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충천하는 자신감에 식을 줄을 모르는 뜨거운 신성·분발의 불을 점화하는 것이다.

<원불교 중앙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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