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하고 꼿꼿한 선비

“젊은 시절엔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날 사람이란 소리를 종종 들었습니다. 그런데 원불교 신앙을 하면서 점차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란 소리를 듣게되네요.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 수산 조정제 교도(秀山 趙正濟, 61세, 전 중앙청운회장, 원남교당). 인상에서부터 청백하고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풍긴다. 1966년 행정고시에 합격,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국토개발연구원과 한국개발연구원 그리고 해운산업연구원장를 거쳐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하고 현정부들어 규제개혁위원회 제1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 오로지 공직의 외길을 걸어온 그의 이력에서도 잘 나타난다.

“규제개혁위원을 맡고 있을 때였어요. ‘개혁을 도와달라’고 요청해 어렵게 결정을 하고 소형차(누비라)를 직접 끌고 정부청사에 들어서는데 주차공간이 없어요. 그래서 장관 전용 주차구간에 차를 대는데 경비원들이 호루라기를 불고 야단이에요. 조그만 차를 자가운전하니깐 못 알아보는 거죠. 그 뒤로도 여러번 이런 일이 발생해 유명해졌어요”

장관을 지낸 사람이면 으레 운전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그의 이런 행동은 가끔씩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장관 망신시킨다는 사람도 있는데, 어때요. 나는 그것이 자연스럽고 편한데…”라며 허세 부리지 않는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4월, 2년 임기의 규제개혁위원을 마치고 해양문화재단 2대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해양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바다를 멀리 하는 나라는 세계를 지배할 수 없어요.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나 세계사를 들쳐봐도 해양력을 갖춘 나라가 대국이 되었습니다. 퇴임하는 그 날까지 모든 국민들의 친해양 기질을 키워주고, 해양문화를 창달하며, 교육시키는 역할을 적극 펼쳐갈 예정입니다”고 밝히는 그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그는 “장보고사업 추진을 통해 해상왕 장보고의 유적을 복원하고 뜻을 기려 우리나라를 동북아의 물류중심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가 해운산업연구원장으로 있을 때 해양수산부 출범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 산파역을 한 것에서 알수 있듯 바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요즘 그는 많은 감투를 벗어 버렸다. 특히 교단 내적으로도 서울교구 교의회 부의장 하나만 빼면 그야말로 평범한 신앙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요”라며 “좌선하고 싶으면 좌선하고,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고, 빠쁠 때는 쉬기도 하고…, 그래도 요즘은 너무 쉬는 것 같아 이번 여름방학에는 향타원 박은국 종사님이 계시는 배내청소년훈련원에 들어가 쉬기도 하면서 풀어진 나사를 죄어올까 합니다”고 말하는 모습 속에는 털기 힘든 원불교인의 냄새가 가득 배여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원불교신문에 논설위원 칼럼을 연재하며 날카로운 시각으로 교단의 구석구석을 잘 짚었던 수산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교단의 교화정책에 남다른 시각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제시했던 교당의 대형화는 아직도 유효합니다”면서 “모든 교당을 전부 대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몇 개 대도시에서 원불교를 홍보하고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대형교당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당주의를 탈피해야 할 것”이라면서 “교단의 전체적인 교화신장을 먼저 생각해, 필요한 교도가 필요한 교당에 다님으로써 교화활력을 가져올 필요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21세기 시민사회를 맞이하면서 NGO활동에 교단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어요. 현재 기독교와 변호사들 위주로 이끌려가고 있는 NGO에 적극 참여하고 지원함으로써 미래 사회를 선도해 가자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뜻있는 교무님들이 NGO활동 전문가로 일생을 바칠 수 있도록 교단적 차원에서 밀어줄 필요가 있죠”라고 강조한다.

“이제 교단도 개혁을 필요로 한 때이고, 새로운 기풍을 진작할 필요가 있어요. 걸리버가 소인국에 갔을 때 무수히 많은 조그마한 줄에 묶여 꼼짝을 못하듯이 우리도 제도라는 줄에 묶여 경직되어 가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수산 조정제 교도의 원불교 입교 동기는 남다르다.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다닐 당시 그는 명동성당에 나가 가톨릭 신앙을 했다. 그런데 성당에만 들어가면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는데, 어느날 일붕 서경보 스님이 쓴 반야심경 해석을 읽고 나서 ‘불교는 나를 커지게 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느껴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불교가 좀 염세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쉽게 다가서질 못하다가 우연히 종로교당에서 박종홍 교수(당시 서울대 철학과)의 강의를 들은 후 교전 속 게송 중 ‘구공 역시 구족’이라는 ‘구족’에서 ‘강한 나’ ‘커가는 나’를 찾았다 한다.

그 후 길을 가다 원남교당(당시 원남지부) 간판을 보고 불쑥 들어갔는데, 마침 그 곳에서 쉬고 있던 한산 이은석 교무를 만나게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또한 그 자리에 있던 여학생(배명전 교도, 당시 성균관대 재학중)과는 후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날부터 그는 고시준비 중임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법회에 참석하면서도 끝나기가 무섭게 빠져나가는 이름 없는 교도로 1년 남짓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원남교당 교무로 재직 중이던 승타원 송영봉 교무님의 특명(?)으로 법회를 마치고 나가려는 그를 교도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불러서 송 교무에게 인도를 했다. 그 자리에서 송 교무로 부터 “청년회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되고, “단장·중앙도 거치지 않은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최근 소원 하나가 이뤄졌다”며 좋아한다. 늘 원불교 신앙을 하는 며느리감을 염원했었는데 최근에 결혼한 큰아들이 원불교 신앙을 하는 아가씨(대구교당 교도 딸)와 결혼한 것이다. “예일대를 졸업한 아들이 시카고에서 취직을 해 며느리와 함께 시카고교당을 다닌다”며 자랑이다.

“혹 정치에 관심이 없느냐”고 슬쩍 던진 질문에 “정치에는 관심이 없을 뿐더러 더구나 아내가 나보다 더 싫어해서 못한다”고 정색을 하는 몸짓 속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나온다.

2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목포에 사는 어느 화가가 그려 보냈다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한국화와 창해만리(滄涇萬里)라 쓰여진 붓글씨를 음미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넉넉함을 느낀다는 조정제 박사. 햇살 드는 창가에서 파란 잎을 가다듬으며 자신을 다듬고 있는 난처럼 꼿꼿한 향기가 풍겨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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