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뿌리, 개척 일관한 푸르름

“미국교화는 이제 거점교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교화가 30년을 넘기는 시점, 초기 미국교화를 일구며 미국에 정착한 뒤 교화에 임하고 있는 콜로라도교당 김종천 교무가 입을 열었다. 그간 인연관계에 의해 미국에 법종자가 뿌려졌으나 이제는 교단이 나서서 정확한 계획에 의해 포석을 놓는 교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주총부 건설은 현지 교화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따라서 이제는 비생산적인 교화지보다는 주로 대도시권의 인구·문화 밀집지역과 종교집산지 등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고한 이민 교화의 삶

김 교무는 박성기 교무(미주선학대학원대)와 함께 미국교화 이민 1세대이다. 미국교화 30년사에서 첫 교무인 이제성·故 정자선 교무와 달리 이들은 같은 시기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다. ‘뿌리를 박고, 뼈를 묻기’ 위해서다.

원기52년(1967) 정유성·전팔근 원로교무가 출가자로는 처음으로 미국교무 발령을 받고 도미 유학하며 미주교화의 시원을 열었다. 이후 본격적인 교화는 원기57년(1972) 이제성 원로교무가 LA에, 이듬해(원기58년) 정자선 교무가 시카고에, 원기59년 백상원 교무가 뉴욕에 교당의 문을 열며 시작되었다.

김 교무는 원기63년(1978) LA로 들어와 LA교당에서 교화와 바야흐로 성장하는 미국의 사무장 역할을 수행했다. 김 교무를 비롯해 초창 교무들의 삶은 미국 이민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의식주 3건을 위해 직업을 가져야만 했고, 특별한 전문 지식이 없던 사람들이라 선택의 여지없이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교도들도 이민초기라 유지비를 낼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에 식당 접시닦이, 목수 보조원, 일당 트럭 운전사, 청과상·꽃가게·가발회사·리커스토어 점원, 생선장수 등의 일을 해야만 했다. 여자 교무들도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며 말보로를 팔았다. 상산 박장식 교령까지도 당시 교무들의 도시락을 싸서 나르는 일을 했었으니 가족이 함께 간 김 교무의 삶은 시행착오와 각고함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개척, 또 개척…

경제적 해결이 1차적인 문제였으나 김 교무는 일 속에 공부와 교화를 놓지 않았다.

원기73년 그는 LA 인근에 있는 벨리에 교당을 개척했고, 원기77년엔 프레즈노에 출장법회를 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에 교당들이 안정적으로 들어서자 원기81년 김 교무는 미련없이 가족을 이끌고 콜로라도주의 덴버로 훌훌 떠났다.

김 교무는 덴버라는 무연고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꾸준히 인연을 지어 지금은 주3회 한국어 법회, 1회는 영어 법회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방4개가 딸린 80여평의 아담한 교당 건물도 마련했다. 후일 여자교무가 와도 교화를 할 수 있도록 세심하고 고른 집이다.

“또 떠날 때가 되었어요. 미국 10대도시중 하나이면서 우리가 교화에 실패한 시애틀에 이젠 남자교무가 또 인연을 지어 봐야죠.”

이제 머리에 흰 서리가 내려앉아 회갑년을 바라보기 시작했음에도 그는 개척을 위해 보따리 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여자교무님들이 개척에 유리할지 모르지만 미국에선 오히려 남자교무가 더 수월하게 개척할 수 있단다.

나이를 먹어도 푸른 기상이 살아있어서 일까, 아니면 늘 푸르게 살라고 하는 뜻일까? 그는 ‘푸를 벽(碧)’자를 써서 벽산(碧山)이란 법호를 받았다. 이같은 그의 삶은 미국교화에 뜻을 둔 후배 남자 교무들에게 하나의 지침이자 귀감이 되고있다.

대를 잇는 미국교화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음에도 두 딸이 아버지를 신뢰하고 이 종교에 질박아 잘 자라줘서 무엇보다 고맙지요.”

한국인 이민사회를 포함해 미국이 온통 크리스찬 일색인데도 성직자인 아버지의 철학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가졌다는게 무엇보다 기쁘다는 것이다.

큰딸 유미는 하버드대학을 마친 후 현재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일본어를 익히고 있다. 유년기부터 미국사회에서 교육을 받았던 두 딸은 미국인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기반인 원불교에 깊은 확신과 고마움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두루 세상사를 접하여 안목을 넓혀준 부모님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유미는 미국사회에 원불교를 알리기 위해 영문판 원불교 청소년 잡지인 (마음의 눈)를 창간하고 현재 편집장을 맡고 있다.

출재가의 구분을 떠나 대를 이어 더욱 완숙한 미국교화에 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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