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은 진공묘유의 조화를 20단계로 설명하는 가운데 제 1차는 지난 시간에 역공·묘섭·조화로 설명하였고 오늘은 제 2차 원공 묘개 조화에 대한 공부를 하겠습니다.

원공(圓空)의 공(空)은 공(空)이 공(空)이 아니라 두렷하게 사통오달로 툭 열렸다는 뜻입니다.

원무미진(圓無微塵)이라. 원은 한 티끌도 없는 자리라. 원일무애(圓一無碍)하나, 원이 하나도 걸림이 없는 것이나, 원무불애(圓無不碍)로다. 원은 하나도 걸리지 않음이 없도다.

이 말은 전부 걸렸다는 말이요, 아무 것도 없는 속에 하나도 걸림이 없으나, 그러나 걸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이치를 밝힌 것이니 이것이 삼학(三學)입니다. 여기에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공(空) 자리요, 또한 걸리지 아니함이 없다는 것은 환히 열렸다, 통(通)했다는 뜻으로 지혜(智慧)입니다. 또 걸리지 아니함이 없다, 걸렸다는 것은 취사(取捨)를 말합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공이불공(空而不空)하고, 곧 비었지만 빈 것이 아니요, 유이비유(有而非有)라,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원공(圓空)입니다. 진리(眞理)라는 것은 시(?)와 종(終)이 둘이 아니고 선후(先後)가 없고 걸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절로 선시(禪時)가 솟으니

‘산(山)은 산(山)이요, 물은 물이로다. 별은 별이요, 구름은 떠가고, 물은 흘러 가도다. 산(山)은 우뚝 솟았고, 새는 날아가며, 바람은 부는구나.’

이런 소리가 바로 걸리지 아니함이 없다는 말, 개개물물(個個物物)이 완연(宛然)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나무로 볼 수 없고, 나무를 사람으로 볼 수 없으나 그 밑바탕에 들어가 보면 다 똑같은 것이며, 하나이며, 두렷한 자리로서 전부 하나로 연(連)해진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주만유(宇宙萬有)가 이름은 각각 다르나 하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상 말한 것은 좌선(坐禪)의 원리편에 밝힌 식망현진(??顯眞)의 원리로써 참 덩치는 우주 그대로가 참 덩치이니 저것이 이것이요, 이것이 저것인 것입니다. 이 원공(圓空)이란 것은 묘(?)하게 열려서 조화(造化)를 이루는데 열려 있는 증거로는 저 나무가 봄이 되면 싹이 터 문(門)을 열고 나오는 것과 같고, 풀잎이 땅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 우주에는 개개물물이 다 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에도 문이 있는데 집을 잘 지었다 할지라도 문이 없으면 가치가 없듯 육신에 있어서의 문은 육근(六根)의 문입니다. 문이 있어서 사통오달(四通 五達)로 열려져 있기에 사는 것이지, 문이 없으면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큰 강물도 수문(水門)이 있기에 유용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와 같은 구조물(構造物)에만 문(門)이 있는 줄 알지마는 마음의 문(門)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마냥 닫아 놓고만 살고 있습니다. 마음문에는 삼독이 출입하는 문과, 법이 출입하는 문 모두가 묘개이지만 묘개의 참뜻을 알아서 삼독의 문을 닫아버리고 법의 문을 열어서 육근에 항상 법이 출입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법의 문을 닫아놓고 삼독의 문으로 살기 때문에 마음이 죽어버리기도 하고 또한, 쌓인 스트레스가 육근문(六根門)을 통해서 폭발적(爆發的)으로 나와서 화도 내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법이 출입하는 마음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화도 낼 일이 없고, 어리석은 생각이나 과분한 욕심도 내지 않아서 마음이 항상 안온하고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란 큰 집을 말하는데 우주에도 문(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큰 문을 출입할 줄 알기 때문에 부처님이 되신 것이지만 범부는 그 문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큰 문을 출입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종교(宗敎)가 수행문(修行門)과 신앙문(信仰門)을 열어놓았습니다. 일상의 일이나 편협한 사고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그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 문에는 수행문(修行門)과 신앙문(信仰門)이 있는데 어느 한 문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두 문을 통해서만이 출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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