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는… 당장의 교세확장은 안중에 없고 기본적인 인간애를 실행하는 종교”

▲ 그림/우세관 교무
대각개교절을 맞아 원불교신문은 ‘소설가 박완서님의 눈에 투영된 원불교’를 특별기획으로 마련했습니다.

소설가 박완서는 1931년생으로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 1970년 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동인문학상 본심 심사위원, 토지문화재단 발기인으로 현재 예술원 회원이다. 만해 문학상(1999)과 황순원 문학상(2001)을 수상했으며 올해 호암상 예술상에 선정됐다.

150여편의 중단편과 20여권의 소설집, 16권의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대표작으로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잃어버린 여행가방》, 《두부》, 《아주 오래된 농담》 등으로 분단상황과 근대사의 질곡, 물질주의 풍조, 여성문제 등 우리 사회의 현상을 예리하게 해부하고 있다.



원불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박청수 교무를 통해서였다. 1980년대 후반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우리 집에서 구독하던 일간지에서였는지 주간지에서였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박청수 교무가 쓰는 칼럼을 즐겨 읽은 적이 있다. 그 분의 신분이 원불교 교무로 돼 있었고, 흰 저고리를 입은 사진으로 봐서도 특정 종교의 수도자 같긴 한데 불교의 스님하고는 다른 것 같았다. 박청수 교무의 칼럼은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의 도리 같은 걸 쉬운 말로 친절하게 설하고 나서 끄트머리엔 꼭 ‘소태산 대종사 말씀하시길’로 시작되는 짤막한 법문이 실려 있었다. 그 법문을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떠오른 원불교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인상은 불교의 스님보다는 훨씬 현세의 삶을 중요시하고, 시주나 동냥에 의존하기 보다는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자신의 생활은 검소하게, 남을 돕는데도 넉넉하게 할 것이라는, 호의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원불교를 독립적인 종교라기보다는 불교의 여러 종파 중의 하나려니 하는 정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나환자와 하나된 원불교 교무

지면을 통해서만 나에게 원불교에 대해 귀띔 같은 걸 해주신 박청수 교무님을 실제로 만나보게 된 것은 의왕에 있는 성라자로 마을에서였다. 나는 가톨릭을 믿는 사람이고, 성라자로 마을 운영위원이기 때문에 그쪽에 갈 일이 종종 생겼다. 이경제 신부님이 생존해 계실 때였고, 5월 달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5월 달은 성라자로 마을이 가장 아름다운 달이고, 환우들의 생신잔치랑, 운영위원회 등 모임이 잦은 달이다.

그런 모임에 갔다가 한 눈에 박청수 교무라고 알아볼 수 있는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우아하고 활기에 넘치는 부인을 만났다. 원래 나는 숫기도 없고, 시력도 사람 알아보는 데 자신이 없어 아무리 세상이 다 아는 유명 인사도 내가 먼저 아는 척을 못한다.

그러나 박청수 교무님은 단박 알아보았고 내가 먼저 자기소개를 하면서 아는 척을 했더니, 교무님은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셨다. 신문에 난 글을 읽고 원불교에 호감을 갖게 된 내력을 대충 대충 얘기했던 것 같다. 어떤 점이 좋더냐고 물으셔서 남녀 차별을 안 하는 종교 같아서 호감이 갔다고 말한 것 같다. 원불교에 대해 실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로 표현하려니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났다.

나는 원불교의 교리보다는 그 종교의 수도자가 천주교도들의 모임에 와서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참여하고 있다는게 참신하게 느껴졌다. 이경제 신부님이 박청수 교무님을 대하는 태도가 신뢰와 존경과 친밀감이 넘치는 것도 보기 좋았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해도 이웃 종교간에 골이 깊을 때였다. 각자의 종교를 나타내는 수도복을 입은 채로 그렇게 편안하게 교류하는 모습은 신기하면서도 보기가 좋았다.

더 놀라운 것은 교무님이 성라자로 마을 나(癩) 환우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나는 환우들을 그렇게 편안하게 대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그 병이 감염될까봐, 또는 그분들의 용모가 정상인과 달라서 그분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냥 너무 애처롭고 미안해서 친절을 다하고 싶지만 내가 건강하고 행복한 한, 어떤 표정을 지어도 위선으로 보일 것 같은 강박관념 때문이다.

종교의 울을 넘는 아름다움

그러나 박청수 교무는 어쩌면 그렇게 꾸민 티라고는 조금도 없이 마치 오래간만에 만난 동기간 대하듯 반갑고 따뜻하게 그들을 포옹할 수 있는지, 교무님에게 조금도 위선이 없다는 건 교무님을 맞이하는 환우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피붙이 대하듯이 활짝 마음을 열고 교무님을 대하는게 눈에 보였다. 저런 인간애는 저 분의 타고 난 인간성일까, 원불교라는 종교의 힘일까? 나는 속으로 궁금해 하면서 그 의심할 여지없는 진정성에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이경제 신부님을 통해 교무님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성라자로 마을을 도와왔으며 환우들과 터놓고 가까이 지냈는지를 알게 되었다. 성라자로 마을에서 유발된 그 분에 대한 호기심은 원불교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고, 그 후 교무님하고 친해지면서 조금씩 원불교에 대한 이해심을 넓혀갔다. 그러나 이 원고가 원불교신문사로부터의 청탁에 의해서 씌어지고 있다는 걸 감안해서 원불교 교리에 대해 아는 척 하는 건 삼가겠다. 까딱하다간 속된 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 될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원불교가 이웃 종교 간의 화합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짧은 역사속 실천력

원불교는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태어난 소태산 박중빈 교조가 우주만물의 이치에 대해 크게 고민하고 정진수도하면서 유불선의 경전은 물론 신구약의 성서에 통달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는데, 깨닫고 보니 그 깨달음이 불교 경전 중 금강경과 많이 닮아 있어서 불교와의 그런 연관성을 존중하고 밝히는 의미에서 원불교라고 이름 붙인 걸로 알고 있다.

이 정도가 원불교에 대한 상식선의 지식일 뿐 원불교 경전을 갖고 있지만 아직 깊이 읽지는 못했다. 성경도 깊이 읽었다고는 말 못하지만, 어떤 종교건 선한 것을 권하고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빈부나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문제인데 원불교는 이웃 종교에 비해 역사가 짧기 때문에 도리어 교조 가르침의 순수성이 훼손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잘 살아있어, 그 실천력도 신도수를 기준으로 한 교세에 비해서 막강한 게 아닌가 싶다.

소태산 대종사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전해지는 해가 1916년이라니 올해로 90년밖에 안되는 젊은 종교이다. 그 역사가 2천년이 넘는 불교, 기독교에 비하면 젊다기보다는 아기라고 불러야할 종교지만 초기의 순진성과, 진리에 대해 왜곡되지 않은 열정이 도리어 어린이만이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간파할 수 있었듯이, 종교간의 고질적인 반목과 증오를 지적할 수 있는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감히 종교간의 화합에 앞장 설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원(圓)… 그 충만감과 간소함

나는 이경제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에 더욱 박청수 교무와 가까워지면서 교무님이 몸담고 있는 강남교당에도 가보게 되었는데 교당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동그란 ‘원(圓)’하나를 모셔놓은 걸 봤다. 법신불 일원상이 원불교의 종지라고 했다. 내가 그 깊은 뜻을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지만, 원(圓) 만이 가지고 있는 만물을 포옹할 것 같은 느낌, 덜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충만감 같은 것은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법당이 간소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박청수 교무가 강남교당 교도들이 모은 돈으로 국내외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얼마나 손 큰 도움을 주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남교당은 부자 동네에 있으니까 신도들도 부자일 테니 교당도 으리으리할 줄 알았다. 국내외에서 재난이 생기거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교무님한테 손 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고 그럴 때마다 그 진상을 알아보고 정말 도와줘야겠다 싶으면 그 때부터 가슴앓이가 시작되는 게 교무님의 못 말리는 천성이다. 남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되면 교무님은 그걸 못 견디고 자기도 모르게 거액을 약속하고 나서 어떡하든지 그걸 마련하는 걸 보면서 나는 교무님을 딱해하다 못해 비꼰 적도 많다. 강남교당 교도들이 무슨 화수분인줄 아냐고. 그러나 교당을 꾸미고 교세를 과시하기 보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데를 찾아 아낌없이 쓰는 건 강남교당뿐 아니라 모든 원불교의 공통점이 아닌가 싶다.

해외에 나가 보면 어려운 나라일수록 원불교 교우님과 우연히 만나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북한을 비롯해서 네팔이나 캄보디아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서 원불교가 펼치고 있는 다양한 구호활동은 결국은 교세 확장으로 이어지겠지만, 당장은 교세확장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와 약을,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을 주는 식의 기본적인 인간애의 실행일 뿐이다.

정직한 기부문화 신뢰성

캄보디아에 개설한 원불교 병원은 모든 치료가 무료일 뿐 아니라 환자에게 빵 까지 나누어준다고 한다. 이런 일에는 막대한 돈이 든다. 이런 자금을 순전히 교도들이 내는 돈으로 충당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 같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으로 굳어진 것은, 그런 구호사업을 하려면 사업을 전담하는 기구와 인원이 생기고, 구호 사업끼리도 명예욕과 경쟁심이 생기면서, 구호의 실적보다는 실적을 부풀리고 선전하고, 기구를 확장하는데 더 열을 올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백만 원의 모금을 해도 이런저런 비용 다 떼고 나면 그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달했을 때는 십 만원 밖에 안 남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사람들에 비해 기부에 인색하다고 하는데 그건 우리의 박애정신이 남만 못한 이기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기부금은 으레 도중에서 다 세어나가고 실지로 전달되는 건 얼마 안 될 거라는 의구심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나는 박청수 교무를 통해 강남교당 밖에 모르니까 강남교당의 예를 들자면, 그 교당신도들은 그런 의심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기부금의 운영을, 백만 원이면 백만 원, 천만 원이면 천만 원이 불필요한데 소모됨이 없이 고스란히 필요한 데 전달되는 걸 믿을 수 있도록 정직하고 투명하게 관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부문화에 대한 원불교의 이런 혁신적인 공헌은 원불교의 교세까지도 허수 없는 실수라는 신뢰감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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