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산종법사의 재임시 큰 경륜사업은 원음방송국 설립, 군종교화 구현, 미주총부 설립추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울러 각 교구별 복지법인 설립으로 복지의 전국화와 시설의 대량 증가가 이루어졌다. 또 중앙총부가 자립경제를 선포했고, 남자전무출신들의 자녀인 원친회원들에 대한 공교육비 장학금 지급 등은 모두 2기 취임시 방향으로 설정했던 것들이다.

아울러 재임시 정산종사탄생1백주년 성업봉찬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도 업적의 하나로 평가된다.

영광 대마출생인 좌산종법사는 17세 때 정산종사를 뵙고 “원불교에서는 법당·법어·법문 그러는데 저는 육법전서의 법은 알아도 그 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고 여쭈었다. 정산종사로부터 “우리가 걸어 다니는 길이 있듯이 사람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 나아갈 길이 있으니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법설이니 법어니 하는 것이다”는 답을 듣고 이듬해 출가를 단행했다.

원광대 원불교학과 시절인 2·3학년 때 정산종법사를 시봉하며 수학했고, 4학년 때는 신도안에 계시던 대산종법사를 시봉했다. 이 때 연탄 부엌을 놓는데 석달에 걸쳐 아궁이를 여러번 고치도록 하는 스승님의 지도에 조금도 불평없이 순응했다. 후일 대산종사는 좌산종법사의 신성을 구정선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신성이라고 칭찬하시었다.

대학 졸업 직후 정남을 서원하고, 법무실 근무와 운봉·익산 교당 등에서 교화자로서의 경륜을 펼쳤다. 교무부장 재임시에는 군종추진, 교도단계별훈련 확립, 어린이 교화개척, 교화연구소 발족, 훈련부와 문화부를 독립시켰다. 문화부장 재임시에는 문화회관 건립, 중앙박물관 설립, 사적 및 유물관리규정 마련, 원불교방송국을 추진했다.

이후 두 번의 수위단 피선과 종로교당 교감(서울출장소장, 서울동부교구장 겸직), 수위단상임중앙(교육발전위원장 겸직)을 맡았고, 원기76년(1991) 대종사탄생1백주년 성업봉찬기념대회시 종사 법훈을 서훈받았다.

원기79년(1994) 11월 종법사에 피선되어 2기 12년을 재임한 좌산종법사는 오는 11월 퇴임을 앞두고 “지금까지 하던 심법으로 교단 대의에 하나가 되어달라”며 “그렇게 되면 우리 교단의 기반이 만대에 공고히 다져질 것이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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