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축가 전교도와 함께 제2창립 열어가겠다”

33번의 타종

29일 낮 12시 45분 원불교 중앙총부에 33번의 타종소리가 법계에 울려퍼졌다. 천주교에서 교황이 당선되는 순간, 하얀 연기를 피어 교황 탄생을 알리듯(콘클라베) 종법사 당선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진 것.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대중들은 새 종법사의 탄생을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영했다. 이 일은 ‘교단의 경사요 큰 자랑이며 원불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내외의 평가를 받았다. 이로써 경산 종법사는 소태산 대종사-정산종사-대산종사-좌산종사의 뒤를 이어 오는 11월 대사식 겸 취임식을 갖고 새 회상 원불교의 다섯 번째 종법사로 취임하게 된다.

교단의 법기

경산 장응철 종법사 당선자는 한결같은 신성과 심법, 청빈하고 검박한 생활로 공부인의 향취와 기풍을 은은하게 풍기는 선풍도골의 풍모를 갖추었다.

흔히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을 든다. 경산 종법사는 선풍도골의 풍모와 감화력을 주는 설법, 오랫동안 서도를 익혀 달마와 글에 일가를 이루었고, 원불교의 요직을 거치면서 남다른 판단력을 갖추어 일찍부터 교단의 법기로 인정받았다. 경산(耕山)이란 법호대로 묵묵히 미리 연구하고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교단 안팎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다.

대중과 함께 하는 교단운영

경산 종사는 취임 일성으로 ‘함께’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인지가 발달한 시대에는 어느 한 사람의 힘보다는 대중과 함께 할 때 무슨 일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산 종사는 “함께 개교100주년을 준비하고, 함께 스승님 경륜을 실현하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대중이 동의해준다면 함께 제2의 창립을 열어가겠다”고 덧붙인 후 “좌산종법사의 유지를 받들어 그 뜻이 선양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품

경산 종법사 당선자는 1940년 전남 무안군 장산면 다수리에서 부친 장상봉 선생과 모친 김출진옥 여사의 2남1녀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녀 주위 인연의 사랑과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러나 7세시 부친의 열반으로 홀어머니를 받들면서 학업과 생업을 함께 꾸려갈 방도를 생각할 정도로 성숙하고 도량이 넓은 철든 소년시절을 보냈다.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세워 어머님을 편안히 모시고자 성실히 살던 경산 종사의 인생을 바꾼 것은 원불교와의 만남이었다.

원기45년 21세 되던 해, 전주에 거주하는 이종 형인 최덕근 선생께서 원불교에 귀의하라는 간곡한 청을 받고 정산종사를 뵙게 되면서 ‘정치가가 되려는 꿈’을 접고 원불교에 입문과 동시에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오직 한 길

4년동안 교정원 총무부 서기를 마치고 원기49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입학, 원기53년 졸업했다. 첫 발령지는 교단의 후진들을 양성하는 영산선원. 교단 창교의 얼이 배어있는 영산성지의 교육환경 속에서 자기발전을 위해 배우는 마음을 놓지않았으며, 신앙과 수행에 대한 적공에 쉼이 없었다. 이런 그의 노력은 교정원장 재임 중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꼭 새 책을 사와 정독하고, 고산 이운권 종사에게 배운 붓글씨는 서법 책을 놓고 연마를 하는 등 끊임없이 연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5년간의 영산생활을 마치고 원기58년 교정원 총무부 과장으로 부임했다. 이 시기는 교정 전반의 상황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산 종사는 원기60년 금강같이 굳은 지조로, 백옥같이 맑은 정절로 남김없이 오직 이 길에 혈심혈성을 바치기로 결심을 하고 정남 서원을 했다.

원기62년부터 5년간 서울사무소 사무장으로 근무했다. 이 시절은 경산 종사에게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견문을 넓히고 대인관계를 넓혀 교단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원기67년 교정원 총무부장에 부임, 순환제 인사제도를 정착시킨 후, 원기73년 첫 교화장인 청주교구장에 부임했다.

청주교구장으로 부임, 교화발전에 노력하는 한편 교구의 숙원사업이었던 교구청 신축불사를 추진하였다.

원기76년 영산대학 학장 겸 영산사무소장에 취임했다. 교육발전계획에 따라 영산대학을 정부가 인정하는 4년제 정규대학으로 승격하기 위해 혈성을 다한 결과 원기77년 상급학교 입학학력 인정학교로 지정받아 우수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를 완비하는 등 인재양성과 교육발전에 심혈을 다하였다.

원기78년 4년제 정규대학을 준비하기 위한 건축불사를 시작했다. 2년동안 40억원의 불사를 원만히 마쳐 교단의 교육정책에 중요한 공적을 나투었다.

원기79년 정수위단원에 피선되었고, 서울교구장에 부임했다. 교단 교화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서울대법회와 동네교화, 화요공부방을 열러 서울교화 발전에 성심을 다하였다.

원기85년 교정을 책임지는 교정원장에 부임, 교정원 전산화를 이루어냈고 영광 핵폐기장 설치를 막아냈다. 그해 정수위단원에 재선되었고, 정산종사 탄생백주년 기념성업에 즈음하여 종사 서훈을 받았다.

교정원장 재임시 매주 월요조회 때 경산 종사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일부러 조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대산종사의 법문을 오랫동안 연마하면서 설하는 법문은 대중들에게 깊은 감명과 울림을 주었다.

원기88년 중앙중도훈련원장에 부임, 전무출신 훈련을 체계화 하고, 홈페이지 개설, 신개축불사를 추진하는 등 훈련여건 개선에도 기여했다.

교법에 바탕한 고경 해석 탁월

경산종사는 원기83년《노자의 세계》를 시작으로 고경 해석에 관한 책을 7권 펴냈다.《생활 속의 금강경》《마음소 길들이기》《자유의 언덕》《수심결》《죄업으로부터의 자유》 《육조단경》에 이르기까지 도가와 불가의 고경을 원불교 교법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석을 한 책으로 경산종사의 신앙과 수행이 그대로 배어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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