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에 이르는 길' ②

대종경 성리품 23장에는 ‘견성은 일찍이 가정에서 쉽게 마치고 성불하기 위하여 스승 찾아 다니며 공을 들인다'고 하였다. 대산종사 법문집 에는 '견성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또 '견성은 대여섯살 가정에서 쉽게 마친다' 이와 같은 스승님들의 말씀에 의아하기는 하지만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견성이 어찌 그리 대 여섯살에 가정에서 쉽게 마칠 수 있을까? 내가 견성이라는 정의를 잘 못 알았을까?

그러나 어쨌든 쉽다 하셨으니 그 쉬운 길을 찾아보자며 정전봉독 하는 중 정전 정기일기법에 ‘감각이나 감상을 기재시키는 뜻은 그 대소유무의 이치가 밝아지는 정도를 대조하게 함이니라??는 법문에서 나는 견성하는 쉬운 길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기뻤다.

‘상근기(上根機)의 구도자들은 높은 차원의 길을 가겠지만 나같이 하근기(下根機)는 이 감각감상을 통해서 한번 해보자. 진리가 무엇인가? 대소유무(?小有無)의 이치 아닌가. 감각감상으로 대소유무의 진리를 깨치고 밝아진다면 이같이 쉽고 좋은 길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깜깜한 밤에 불빛하나 얻은 듯 기쁘고 희망에 부풀었다. 아 하!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제자들 지도하실 때 감각감상을 시키시며 1甲, 2甲, 12甲 등의 성적 매겨주시며 격려하신 뜻은 이런 방법으로 견성하게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나대로의 의미를 매겼다

대종경 변의품 40장에는 ‘견성의 경로도 천층만층이요' 수행품 43장에는 '깨달아 아는 것도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통만통이 있나니라'하셨고, 대산종사 법문집에는 '깨친다는 것은 한번에 툭 깨치는 것도 있지만 천각(?覺) 만각으로 수 없이 깨치는 데서 대각을 이룬다'고 하셨다.

나는 이 법문이 바로 감각감상을 통해서 1각, 2각, 천각, 만각을 이룬다는 말씀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이 길로 견성해 보겠다는 강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처음 견성해 보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제일 먼저 장애 요인은 의심(疑心)이 걸리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교법이 쉽고 간명하여 웬만한 건 의리선(義理禪)적으로 해석해 버리고 어려운 의두건은 어려우니 제처 두고 하여 의심이 걸리지 않는 것이 견성의 마장 이었다.

교전에서 해결책을 찾을려고 몸부림칠 때 대종경 성리품 31장에 게송 법문을 내려주신 후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고 하였다.

나는 첫 의심(疑心)이 관조였다. 나는 의두건을 연마하면 모두 사량(?量)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관조로 깨치는 것인가 하고 혼자 고민하던 차에 감각감상으로 성리연마를 하다보면 관조로 깨치는 법도 알아지겠지 하고 막연하나마 자위하고 감각감상으로 사활을 걸어 보기를 작심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쉽게 생각한 감각감상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저 막연히 남의 감각감상이나 흉내 내고 모든 것이 일상에 젖어 그저 그런 것인데 하며 당연한 것은 느낌과 깨침으로 와 닿지가 않고 시간만 보내곤 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일을 장차 어찌하며,고민 끝에 대화를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저 꽃나무 풀 등 모두와 대화 하다보면 뭔가 감각감상이 생기겠지 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안되었다. 나 혼자 넋두리하는 것이었다. 나 혼자 중얼거리다 말다 일방통행 이었다. 응답이 없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저 나무 꽃 풀 등 무정물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대화를 기대했던 내가 웃긴 일이지 하면서 탄식하곤 했다. 꼭 믿었던 견성의 지름길인 감각감상이 나를 절망시켰다.

허나 이 길 밖에 다른 방도는 없다.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냥 어쩔 수 없으니 그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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