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 7대륙 최고봉과 남북극점을 정복한 허영호씨가 초경량 비행기로 경기도에서 제주도를 날아가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기사를 보며 부러웠다. 높이 나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고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서 게딱지같은 63빌딩을 바라보면 아웅다웅 다투는 인간사가 우습게 생각된다.

“사람 하나를 놓고 심·성·이·기(心?理氣)로 낱낱이 나누어도 보고, 또한 사람 하나를 놓고 전체를 심 하나로 합하여 보기도 하고, 성 하나로 합하여 보기도 하고, 이 하나로 합하여 보기도 하고, 기 하나로 합하여 보기도 하여, 그것을 이 자리에서 말하여 보라"하고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처럼 다른 여러 차원에서 쳐다보라는 말씀이다.

심성이기는 성리학의 범주설이다. 심과 성은 주로 성품을 파악하는 구도요, 이와 기는 존재의 양태를 말한다. 심성이기는 대소유무의 구도와 더불어 성리를 조각내어 삼키도록 한 대종사의 특별처방 중 하나인 것이다.

이 법문에서 우리는 ‘분석과 통합'이라는 진리인식의 두 차원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하나의 교훈은 한 면에 집착도 말고 양 면으로 분열하지도 말라는 점이다.

분석 혹은 통합이라 할 경우 사람들은 즉각 그 의미에 집착하고, 집착은 오류를 낳아 원만한 인식에 이르지 못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크랙이 있다. 그것은 이 법문의 주안점이 심성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는 점이다. 히말라야를 등반하거나 극지를 탐험하는 데에 가장 위험한 것은 얼음이 갈라져 생겨난 크랙을 잘못 밟는 일이다.

성리의 주제는 인간이다. 인간이 아닌 심성과 이기에만 눈이 고정되면, 뒤에 나오는 ‘염소 먹이는 비유'가 그 설 곳을 잃게 된다. 사람은 대종사 교법의 출발인 동시에 매듭이며, 삶은 성리의 내용이다.

사람이 먼저이고 심성이기가 다음이다. 심성이기는 시각의 틀일 뿐, 사람은 삶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종사는 ‘염소를 먹이로 키워 새끼도 낳고 젖도 나오도록 한다'는 비유를 덧붙여 분석이니 통합이니 하는 것을 염소 키우기로 비유한 '삶 그 자체'에 용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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