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관조로구나
사량이 아닌 관조

그렇게 봄부터 시작하여 가을이 되었다. 그 날도 예전처럼 총부 뒷 동산에 산책하고 있었다. 자연과 대화 한답시고 혼자 중얼거리며 걷다가 단풍이 든 나뭇잎이 참 예뻐 만지작 거리며 “얘야 참 예쁘구나. 어쩜 이렇게 곱게도 물들었니? 정말 예쁘구나”하며 말을 걸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단풍잎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병이 들었는데 나보고 예쁘다고 하니 난 이제 곧 떨어져 죽어”

“아 그래 맞아 네가 지금 병든 거지 나도 병들었는데 너도 병들었구나. 나와 같은 신세구나. 그런데 넌 아프지 않니?”라고 내가 말했다.

그랬더니 “멍청아 나는 무정물이잖아. 그러니까 아프지는 않아”하는 거였다. “응 그래 그렇지”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응, 우리는 생로병사로 돌고 너희들은 춘하추동으로 돌고 도네. 결국은 같은 이치이네”하는 생각이 들며 무슨 대단한 진리나 깨친 것처럼 흥분이 되어 곧장 숙소로 돌아와 <일원상 법어> 편을 펼쳐 보았다.

“생로병사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라는 부분을 읽고 일찍부터 배워 알고는 있었어도 순간 나는 내가 꼭 혼자 깨쳐 알게 된 진리를 대종사님께서 이 법어로 증명해 주신 것으로 생각되었다. 참 어이없는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는 그런 착각을 할 만큼 기뻤다.

“아! 관조(觀照)로구나. 사량이 아닌 관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나의 첫 의심건으로 관조를 잡게 되었다.

사실 대화라고 해서 저 초목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 혼자 중얼거리는 넋두리 일 뿐이지. 그런데 종전과는 달랐다. 응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응답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다음부터는 대화가 되었고, 유치하지만 감각감상도 더러는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어처구니없는 의심 하나가 또 생겼다. “교전은 진리가 아니네” 하는 거였다. 교전을 진리로 알고 교전에만 매달리고 의지하여 지냈던 난데 실로 엉뚱한 의심이 생긴것이다.

나는 당황하면서 “내가 왜 이런 의심이 걸리지?”하고 그 의심을 궁구하던 중 대종경 성리품 25장에 “불조(佛祖)들의 천경만론(千經萬論)은 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나니”라는 대목에서 “아! 바로 이거야 교전은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야 손가락인 교전을 통해서 참 달인 진리 자체를 관조 또는 직관으로 보는 것이야. 이래야 견성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참고 삼아 인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에 대한 일화 한 토막을 오쇼 라즈니쉬의 글로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수만평의 초지를 가진 영주의 아들이었다. 그의 토지 가운데에는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지붕이 달린 조그마한 나룻배를 타고 강 위에서 지내곤 한다. 타고르는 미(美)의 숭배자로 삶 자체가 아름다운 시였다고 한다. 미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크로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문을 애독한다. 어느 보름달이 뜬 밤 나룻배 안에서 작은 촛불을 켜놓고 논문을 읽다가 피곤하여 촛불을 끄고 자려는 순간 너무 아름다운 달빛이 배 안을 가득 메운다. 밖으로 나갔다. 달빛과 고요한 강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에 순간 숨막힐 듯 하였다. 그 심정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름다움이 온통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외면한 채 아름다움에 대한 책속에 파묻혀 있었다. 아름다움은 책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 있었다. 내가 켜놓은 작은 촛불이 그 아름다움을 가로 막고 있었다. 촛불의 연약한 빛 때문에 달빛이 내 안으로 들어 올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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