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는 무로 무는 유로

원기 26년(1941) 1월에 대종사는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이라”는 게송을 내리고 부촉하셨다.

“임종에서가 아닌 미리, 소수가 아닌 모두에게 전하니 각기 정진하여 후일에 유감이 없게 하라”(부촉품 2장)고 덧붙였다.

게송은 소태산 생애의 정점에서 설해졌다는 점에서 진리적인 구극성이 있다.

또한 교리를 가장 압축된 의미와 상징으로 축약했다는 점에서 고농축의 상징성이 있다.

그리고 존재의 실상을 운율에 바탕한 노래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보편적 대중성이 있다.

대종사의 게송은 일원상진리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이면서 현실대응의 원리로 원용될 수 있다.

한편 원불교적 논리인 동시에 사관(史觀)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유는 변하는 자리요 무는 불변하는 자리”이다. <일원상 서원문>에서는 변과 불변을 무상과 유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리”란 “입장” 또는 “시각”을 말한다. 즉 주체적 자각에서 포착되는 진리의 모습이라 하여 좋을 것이다.

게송에서 진리인식의 제 1단계는 유무변환(有無變換)의 단계이다. “돌고 돌아”는 유무변환이라는 뜻이며, 이러한 유무변환의 동적 양태가 영원하다는 의미와, 주고받는 인과보응의 진리가 끊임없이 유행된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 차원에 머물러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속성상 사상(事象)이 변화하면 변화하는 것에 집착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여 사바세계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제 2단계인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단계 즉 “구공(俱空)”으로 도약이 필요하다. “지극하면”은 새로운 차원에로 도약하는 계기적 전환점이다. 그것은 바로 깨침이다.

범부의 일상적 안목에서 부처의 초월적 안목으로, 무명의 어두움에서 깨침의 광명으로 전환함이다. 그러나 깨침의 눈부신 광명에 진입한 수도인은 온통 사라짐만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구공의 소식이다.

이제 제 3의 일체개진(一切皆眞) 즉 “구족(具足)”의 단계로 또 한 차례의 도약이 요청된다.

그러나 도약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단계를 설정하기는 했으나 이는 논리적 전환일 따름이다. 사실 철저한 구공은 그 자체가 바로 구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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