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 박영철 공동대표
3·15 정신 되살리는 김 열사 추모사업회에 정성 기울여

“남은 여생을 지역 사회에 봉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재산도 사회에 환원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나니 모든 것이 편안해요”

김주열 열사 추모 사업회 박영철(67·법명 재영·도통교당) 공동대표의 빈 마음 이면에는 지역사회와 함께 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동안 그는 김 열사 추모 사업에 정성을 기울여 왔다. 희끗 희끗한 머리카락이 그 세월을 대변해 주고 있다.

지역에서는 김 열사가 거론될 때마다 으레 박 대표를 떠올릴 정도다. 그만큼 그는 김 열사와 알게 모르게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지난 9~11일 진행되었던 소통과 화합을 위한 186김주열 대장정에서도 조직위원으로 활동하며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3.15부터 4.19까지 희생된 186위 영위중 김주열 열사가 중심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산 3.15 시위현장에서 산화한 김 열사의 참혹한 주검이 4.19와 연결고리이자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권찬주 여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바꾸어 놓은 엄청난 일들은 모정이 만들어낸 결정체입니다. 행방불명 소식을 접한 권 여사가 마산의 시장바닥과 골목골목을 헤매며 열사를 찾아달라 호소했던 그 애절한 사연이 마산 시민의 심금을 울리게 되었지요”

4월11일, 행방불명 27일만에 최루탄이 박힌 열사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면서 전국은 물론 전 세계가 경악하고 분노했다.

참혹한 시신을 확인한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결국 2차 마산시민 항거로 이어져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마침내 4·19혁명을 이루어 냈던 것이다.

“ 이제 김 열사는 누가 뭐래도 남원의 아들이면서 마산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호남의 아들이면서 영남의 아들로 동서화합의 중심축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다행히 국비, 도비, 시비를 합해 20억을 확보해 2008년까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성역화 사업은 우선 폐가 위기에 처해있는 생가 매입 및 복원을 비롯 부대시설을 갖추게 된다. 예산이 더 확보 되는대로 추모각과 기념관을 새롭게 단장할 계획이다.

“ 한 사람의 묘가 세군데 있는 사람은 김 열사 밖에는 없습니다. 마산 국립 3.15 묘지와 서울 국립 4.19 민주묘지에는 가묘가 있고 남원 묘소에는 뼈가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가묘가 있는 두 묘역에 비해 남원 묘소는 거의 방치되다 시피 하고 있어 애석할 따름입니다”

박 대표가 김 열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80년대 초반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작은 모임인 민주실천동우회 2대회장을 역임하면서 부터.

그에게 김 열사의 꼬리표가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20여년 동안 올곧게 시민단체 활동을 펼쳐온 그는 성직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한마디로 요약했다.

전무출신한 차남 박기홍 교무(삼동원)에게도 자주 강조하는 내용이다.

“성직자는 교세를 넓히는데 힘을 쏟기 보다 우선 어려운 이웃들을 살피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그의 말이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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