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관 교무가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
깨달음은 인류와 우주 자연으로 존재지평을 열어가는 정신개벽

"대각을 하고서 전 생령을 아니 사랑할 수 없고,
전 생령을 고루 사랑하고서 대각을 아니 할 수 없다

종교가 신도들을 위해서 있는것이지
신도들이 종교를 위해서 있는것이 아니다"



김성관(金聖觀) 교무·원광대 철학과 교수

1948년생

영산선원, 동산선원 교무과장
원광대학교 인문대학 학장, 도덕교육원 원장
신룡교학회 창립, 제1대 회장
열린정신포럼 창립, 제1대 회장
원광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제1대, 2대 소장
원광대학교 열린정신연구소 제1대 소장
원불교원친회 수석부회장, 원광학원 원친회 회장
템플대학교 객원교수(Visiting Professor)
펜실베니아대학교 객원학자(Visiting Scholar)
호는 공산(空山)이다.

저서

《융심리학과 동양종교》
<심성설에 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융사상의 비교
고찰을 중심으로
《일원상 진리의 제연구》 (공저)






20년 전 대각개교절 특집으로 ‘일원상의 진리와 대각’이라는 글을 바로 이 난에 실었다. 이제 내년이면 이순이 되는 나이에 다시 ‘원불교 대각의 의미’에 관해 원고 청탁을 받고 망설이다가 쓰기로 하고 그때의 글을 보니 불혹의 사십 대답게 빈틈없이 엄숙하게 썼던 것 같으며 세월이 벌써 그렇게 지나갔나 하는 인생무상의 깨달음이 앞섰다.

그때보다 지금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우주와 인생의 본질에 관해 엄숙하게 원론적으로 설교하고 신앙하게 하는 종교나 철학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더 나아가 종교무용론이나 종교유해론까지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종교는 더 이상 레저·스포츠와 게임을 하려 해서는 안 되며, 설교시에도 서슴없이 유행가를 섞어야 하고, 정치·경제·사회의 현실적인 이슈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시대에 종교 성인들의 깨달음이 오늘의 이 사회와 인류에게 어떻게 다가가서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원불교 대각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물음은 이 시대가 지닌 또 하나의 화두이다.

브리하드 아란냐카 우파니샤드에서는 “누구든지 그 자신(아트만)을 깨닫게 되면 그(브라흐만)가 된다”고 하여 나의 본원과 우주의 본원이 같기에 나를 깊이 알아 크게 열어가면 우주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불타의 깨달음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연기법이다. 불타는 이것과 저것 혹은 나와 남 등 우주만유의 모든 존재들이 인연에 의해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연관된 존재들이므로 작은 나의 존재 지평을 큰 나인 일체중생과 우주자연의 존재 지평으로까지 열어가야 함을 깨달으신 것이다. 이를 따라 대승불교는 보시를 계율보다 중시하면서 중생의 몸이 자기 몸이므로 중생의 괴로움 또한 자기의 괴로움이라 여기는 동체대비(同體??)를 실천하는 데로 나아갔다.



깨달음은 열림開闢과 살림相生

이렇듯 깨달음이 좁은 나의 존재 지평을 넓은 나의 존재 지평으로 열어가는 것이라 할 때 기독교의 바울이 말했던 종교적 체험은 깨달음에 유비될 수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장에서 ‘나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깊이 들어간 종교적 변환과정에 의해 이전의 의식 상태로부터 변환된 것으로 불교의 깨달음에서 작은 나인 소아가 큰 나인 대아로 변환되는 것과 유비되며, 심층심리학적으로는 Ego가 Self에 의해 교체되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을 이루시고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하신 후 “이 원상의 진리를 각하면 시방 삼계가 다 오가의 소유인 줄을 알며, 또는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또는 제불·조사와 범부·중생 성품인 줄을 알며……”라고 하셨다. 또한 사은에서는 우리가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은혜 없이 존재를 보전하여 살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볼 때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 역시 작은 나로부터 큰 나인 인류사회와 우주자연으로 그 존재 지평을 크게 열어가는 정신개벽이요, 서로가 은혜의 관계로 얽혀 있음을 철저히 알아 서로를 살리는 지은보은이다.

후계 종법사인 정산 종사는 “동원도리, 동기연계, 동척사업”이라는 삼동윤리를 말씀하셨고, 대산 종사는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 하시면서 세계평화 삼대제언으로 “심전계발의 훈련, 공동시장 개척, 종교연합 창설”을 제창하심으로써 하나임을 깨달아 서로를 살림으로 나아가자고 하셨다.



열림과 살림은 공존하는 것

종교의 기능을 영성회복으로서의 열림과 사회구원으로서의 살림으로 나누어 주로 개인의 내적 해탈을 위해 명상하고 수행하는 전통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종교가 전자라면 집단의 외적 통합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 받는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의 종교는 후자라고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혹은 미래에 원불교가 해야 할 우선적 역할이 영성회복인 열림과 사회구원인 살림 가운데 어느 것이 되어야 하는가에 관해 의견을 달리하곤 한다. 종교사의 전개과정에서 볼 때 이러한 이분법적 분류가 어느 정도 타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종교 성인들의 깨달음은 어느 한편을 배제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언제나 영성회복의 열림을 통해 살림의 사회구원으로 나아가거나 사회구원의 살림을 통해 열림의 영성회복으로 돌아오는 것이어서 이 둘은 서로 공존하고 공조하는 것이지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모습은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 후 조단훈련·혈인기도와 함께 방언공사·저축조합 등을 함으로써 공부와 사업을 병행케 하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생각해보건대 진정한 영성회복은 사욕에 막혀 있는 작은 나가 큰 나인 사회와 세계의 구원을 향해 열어나감이며, 진정한 사회구원은 겉치레에 그치기 쉬운 외적인 구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구원을 함께 하기 위해 스스로도 영성회복으로 돌아옴이다.

대산 종사가 “대각을 하고서 전 생령을 아니 사랑할 수 없고, 전 생령을 고루 사랑하고서 대각을 아니 할 수 없다”라고 하심이나 허준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의원은 환자를 고치고, 환자는 의원을 고친다”라고 하여 환자들이 자원봉사를 하던 허준에게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도록 마음을 열게 했다고 함은 이것과 관련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인들의 깨달음은 인류사회의 흐름이나 우주자연의 리듬을 향해 열어가는 것이며 또한 인류사회의 흐름이나 우주자연의 리듬에 참여하여 그것을 살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림과 살림은 어느 시대에나 현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깨달음의 원형적 틀이다. 마치 좋은 집을 지으려는 마음은 어느 시대의 누구에 관계없이 공통되지만 그 재료와 상황에 따라서 지어 나타난 것은 벽돌집도 기와집도 아파트도 될 수 있듯이 열림과 살림은 모든 성인들의 깨달음에 공통되는 원형적 틀이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문화적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제시한 깨달음의 표현은 일원상 진리와 일원상 상징이다. 이 표현이 지닌 열림과 살림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필자는 원미 Vol. 23에 일원상 찬송을 ‘하나로 두렷하신 바탕이시여 진공과 묘유의 조화로 시작도 끝도 없이 드러나고 숨으신다. 분별과 망상을 넘어서 텅 빔에 진실되니 진공실상 체이신가. 묘유의 무한한 덕성이 두렷하게 가득 차니 원만구족 상이신가. 인과의 조화작용으로 사사 없이 공정하니 지공무사 용이신가. 있고 없고, 없고 있음이 끝없이 순환하니 유와 무가 공이신가. 음양대소 영육동정의 대극을 두루하니 조화로운 원이신가. 이편저편 고금과 미래 무사로 보응하니 지공하신 정이신가’라고 쓴 적이 있다.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이 지닌 열림과 살림의 현재적 의미는 바로 일원상(○)이 알려 주는 공·원·정의 ‘텅 비어 무엇에도 묶이지 않고 두렷이 원만하고 공정함’에 있다. 과거와 이념에 묶이지 말고 끊임없이 바뀌고 있는 인류사회의 흐름과 우주자연의 리듬으로 열어나감과 살려나감을 ‘텅비어 원만하고 공정한’ 일원상의 공·원·정에서 찾아내야 한다.



열림과 살림은 깨달음의 통시대적 원형

이제 종교는 공·원·정으로 표현되는 열림과 살림의 깨달음에 따라 엄숙주의의 구태에 묶이지 말고 흔쾌히 레저·스포츠를 받아들이며, 복지에 힘쓰고, 설교에서 대중가요 등도 섞음으로써 인류사회에 즐거움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하며, 선·요가 등을 통해 웰빙과 심전계발에 노력하고, 깊은 내면을 상담해 줌으로써 영성을 열어주어야 한다.

또한 종교무용론이나 종교유해론에 대해서는 종교가 연대해서 합력하는 종교연합, 예를 들어 원불교 종교연합봉사단이나 원광대학교 종교연합봉사단 등을 통해 대응해야 하며, 정치·경제·사회의 현실적인 이슈들, 예를 들면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이나 공동시장 개척 등에 대해서 극좌나 극우에 치우치지 않는 원만한 의견을 일원상의 공·원·정으로부터 찾아 제시해야 한다.

이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승리하여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에 따른 이기주의화와 불공정거래 등의 문제점을 공정하도록 보완해야 한다. 그곳의 젊은이들조차 회의하기 시작한 사회주의적 공동체 생활과 이념으로 되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공·원·정으로 표현된 열림과 살림의 깨달음에 어긋나는 일이다.

우리 종교인들이 먼저 “종교가 신도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신도들이 종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을 때 성인들의 큰 깨달음도 현재적 의미로 오늘의 인류사회에 다가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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