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처불상임을 아는 것은 견성이요,
사사불공하는 것은 원만행이다

<실타원 오은성 원로교무>


정산종사 법어 응기편 28장에는 ‘도통 법통을 먼저 하고 끝으로 영통을 하여야 하나니, 만일 영통을 먼저 하면 사에 떨어져 그릇되기 쉽고 공부도 커나가지 못하나니라.’고 하였다.

이 법문은 내가 견성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나는 견성을 영통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도통은 혜문이 열리는 것, 견성의 극치, 영통은 영문이 열린 것, 견성은 못해도 이적이 나타나고 신령이 열린 것을 통하지 않고도 할 수 있구나 하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이요, 초견성이구나 하고 느끼고 여기에 실체를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씀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증거를 나는 사변적으로 알았다, 이해가 되었다는 말씀이 아니고 직관으로 깨달았다는 말씀이셨다. 실체란 그 근원을 요달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초견성은 하근기의 견성임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대종경 수행품 23장에는 ‘끊임없이 읽을 수 있는 경전을 보았는가. 세상 모든 것이 하나도 경전 아님이 없나니 눈을 뜨면 경전을 볼 것이요. 귀를 기울이면 경전을 들을 것이요, 말을 하면 경전을 읽을 것이요…’라고 했다.

대종사님 ‘나는 산 경전 보느라고 지묵으로 된 경전을 볼 틈이 없다.’ ‘득도하는 것이 어떠한 계기에 별일 아닌 것으로도 깨닫는 수가 있다. 큰데서만 도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대종사 그때 그 말씀’ 중)고 하셨다.

대산종사는 ‘견성은 어쩐지 모르게 오래오래 연마하다 보면 되고 마음이 환하게 열리는 것인데 견성은 저 산봉우리를 본 것과 같다’ ‘처처불상임을 아는 것은 견성이요, 사사불공하는 것은 원만행이다. 견성을 하면 전체를 부처로 알므로 변함없는 불공심이 나온다.’(대산종사 법어 106쪽)

나는 내가 깨친 것이 견성인지 아닌지 의심났을 때 소동파의 견성인가 받은 시를 보고 ‘아, 그렇구나!’하며 감정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소동파는 어느날 대문장가가 되고 보니 절집의 스님들이 우습게 보여 한번 코를 꺾어볼 양으로 옥천사 승호선사를 찾아갔다. 스님이 “뉘시오”하니, 소동파가 “칭가요”했다. “칭가라니요”하고 스님이 묻자 “저울칭자 칭가요” 했다. 이에 스님이 눈치를 채고 갑자기 천지가 진동할 만큼 “할!”하며 “이것이 몇 근이나 되는지 달아보시오”하니 소동파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경솔함을 반성하고 정중히 스님에게 “불법의 적적대의가 뭣이요”하고 물으니, 스님은 묵묵부답.

소동파는 두 번째로 불인 요원선사를 찾았다. …중략… 세 번째로 여산 흥룡사 상총선사를 찾아 예의 물음을 던지자 스님 왈 “거사는 유정설법은 들을 줄 알면서 무정설법을 들으려고는 안하시오.” 소동파는 처음 듣는 무정설법이 라는 말에 기가 막혔다. 무정설법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 못한 것이다. 천하문장이 이 무정설법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절에서 물러나와 말을 탔으나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 가는대로 맡기고 ‘무정설법’이라는 단어 넉자가 의심으로 천하에 가득 찼다. 자존심도 상하고 의심도 나고,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비온 뒤라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지라, 그 소리에 확 깼다. ‘아! 바로 이것이구나.’하고. 그리고 시 한 수를 읊었다.

‘시냇물 소리가 이 부처님의 법문이요, 산 모습이 어찌 청정법신불 아니리요, 은밀히 들려오는 팔만사천 법문을, 다른 날 누가 불법의 뜻을 물으면 어떻게 들어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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